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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뒤늦은 ‘자아’ 이야기

입력
2017.04.1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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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대의 성장기에 ‘자아’라는 말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함께 도착했을 수도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 싱클레어가 스무 살 무렵 1차 세계대전의 전쟁터에서 부상당해 야전병원에 누워 있는 장면에서 끝난다. 밝고 안정된 기독교 가정의 모범생으로 자라난 소년은 영혼의 안내인이자 자기 자신 속의 ‘참된 나’를 은유하기도 하는 데미안과의 만남을 통해 세계의 어둠과 밝음을 함께 껴안는 성숙한 젊은이로 성장해 있다. 육신은 신음하고 있지만 그는 한 세계를 깨뜨리고 나온 것이다. 그는 이제 자기 안에서 우러나오는 내면의 명령을 좇아 자기 자신만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얼마 전 근 40년 만에 ‘데미안’을 다시 읽으면서 규율과 강제의 대상으로 나 자신을 좁혀야 했던 숨 막히는 중고등학교 생활이 떠올랐고, 그런 거라면 그 시절 싱클레어에 대한 턱없는 동일시도 얼마만큼 이해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다분히 낭만적인 진정성의 자기 서사는 그 후로도 꽤 오래 내게 영향을 미쳤지 싶다. 내 대학 시절의 상위 이념은 ‘존재의 의식 규정성’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이를 애써 의식화하는 가운데 오히려 ‘자아’의 공간은 다시 한 번 실제 이상으로 과장된 채 남아 있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 불가피한 간극에 도덕적 윤리적 자기 명령이 들어오고 그것이 ‘실천’이라는 강요 사항이 되면서 사회학자 김홍중이 말한 ‘진정성의 체제’는 또 다른 낭만적 이상화의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너무 거창했던 것이 아닐까. ‘데미안’도 그렇고 80년대도 그렇고. 그런 점에서는 자아의 신화를 해체하고 인간 주체성에 대한 첨단의 수술로 치달았던 서양의 현대 철학이 지난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급속도로 유입되어 온 과정에도 일종의 ‘거대담론적’ 편향이 존재했다는 느낌도 든다. 그 끝없는 언어와 사유의 반성의 절차 다음에도 남아 있는 실체로서의 자아, 미약한 대로의 주체성을 붙들고 우리는 대낮의 거리에서 만나고 살아간다. 객관적이고 자명한 세계와 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다.

역사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윌리엄 M. 레디는 <감정의 항해>(김학이 옮김, 문학과지성사)에서 감정 표현이라는 이모티브(emotive)가 가진 ‘자아 탐색’과 ‘자아 변경’의 수행적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우리의 ‘자아’를 포스트구조주의가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간 ‘주체성’이나 데카르트적 이분법의 틀 바깥에서 재건하고 재개념화할 방법을 찾는다. 기표와 기의의 무한한 미끄러짐 사이, 그 자의성의 감옥에 우리가 갇혀 있기만 한 것은 아닐 테다. 우리는 수시로 우리의 느낌을 발화하며 산다. 이때 많은 생각 재료들 중 어떤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고 선택하고 활성화하고 배열하는 작업을 우리는 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미결정적일 수밖에 없는 그 ‘번역’ 작업은 바로 그 미결정성을 통해 감정의 자유와 감정의 항해를 가능하게 하며, 그런 한 이곳은 주체성이 자신의 장소를 발견하는 장이고, 자유와 역사적 변화가 다시 의미를 획득하는 장일 수 있다. 감상주의라는 감정 체제의 관점에서 프랑스 혁명기 공포정치 전후의 역사를 설득력 있게 재조명하는 가운데 전개되는 그의 ‘이모티브 이론’이 이렇게 거칠게 요약될 수는 없겠지만, 자유와 주체성의 장소를 인간 개인의 자아 안에서 되찾으려는 그의 이론적 노력은 실질적인 인간 역사와 현실의 감각 위에 있는 듯했고, 그 점이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생각해보면 ‘데미안’은 유례없는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으며 ‘자아’의 근거를 한 순간에 잃어버린 당시의 독일 젊은이들에겐 너무도 절실한 책이었을 수 있겠다. 싱클레어-데미안 놀이를 하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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