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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보통 노인의 구술 자서전

입력
2016.11.14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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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학을 끔찍이도 사랑한다. 문학만큼 인생에 대해 세밀하고 직접 설명해주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 길어진다. 우리가 좋아하는 물질의 유혹에 빠져들수록 인생의 유의미한 시간은 짧아진다. 그래서 나는 인생을 늘리기 위해 문학을 읽는다. 이렇게 소중한 문학도 경건히 고개를 숙여야 할 대상이 있으니, 바로 한 사람의 구체적인 인생이다. 어떤 문학도 그 앞에서는 잘난척 해선 안 된다.

지난 주말 천안에서 열린 뜻깊은 행사에서 사회를 봤다. 충남학생교육문화원에서 청소년 봉사단 활동의 하나로 6년째 이어오고 있는 ‘어르신 자서전 써드리기’ 사업의 최종 단계, 자서전 전달식 행사였다. 일반인들이 자서전이나 문집을 내는 경우는 많이 있지만, 나이든 이들이 구술하고 청소년들이 받아 적어 책으로 완성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자서전이 나오기까지 노인과 학생은 1년 동안 여러 차례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학생들은 팀을 이루어 그 이야기를 정리했다. 나는 전체 행사 진행 대본을 작성하기 위해 사전에 원고를 받아서 읽었는데 눈물 없이 읽은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

노인들은 기억이 닿는 한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이야기했다. 평소 가족들에게도 하지 않고 마음에만 깊이 담아두었던 이야기도 많이 나왔다. 김범환 할아버지는 인생 말년에 무려 다섯 가지의 중병 치료를 했다. 자서전을 준비하는 동안 학생들과 주로 병원에서 인터뷰를 했다. 친손녀와 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는 육신의 고통 속에서도 웃을 수 있었다. “그동안 가슴 속에 묻어왔던 내 지난날들을 이번 기회에 다 털어놓을 수 있었어. 옛날에 내가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사람을 만났고,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되돌아볼 수 있었던 것 같아.” 김 할아버지의 말은 이 자서전이 가지는 의미를 잘 나타내준다. 인생이 뭔지를 생각해볼 틈도 없이 달려온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의미를 찾도록 후세대가 도와 드린 행복한 일인 것이다.

행사 진행을 보던 나는 박만서 할머니의 손을 보고 나도 모르게 그 손을 잡았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8남매를 훌륭히 길러낸 그 손은 손가락 열 개가 모두 휘어 있었다. 내가 할머니의 손을 높이 들어 올리자 객석에서는 96년의 세월을 빚어온 그 아름답고 위대한 손에 깊은 존경의 박수를 보냈다.

이번에 자서전을 낸 40여 분의 노인들은 모두 현대사의 격동기를 정면으로 통과해온 분들이다. 험한 세월을 견디며, 오직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그래서 이 자서전은 한 개인의 가족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가장 세밀한 우리나라의 역사이기도 하다.

노인들의 구술을 대필한 학생들도 얻은 바가 컸다. “한 사람의 인생을 글 속에 담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를 통해 유한한 인생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갈 것을 다짐하였습니다.”(천안여고 장유진) “할머니가 알려주신 옛 정신과 우리 민족의 과거를 잊지 않는 것이 지금 슬럼프를 겪고 있는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행동이 아닐까 싶습니다.”(천안여고 박은영) 이런 게 진짜 살아있는 교육이다. 나는 전국을 다니며 충남학생교육문화원에서 하는 ‘어르신 자서전 써드리기’에 대해 자랑하고 싶다.

“잿더미 속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은 꿈만 같습니다. 80여 년의 삶을 사는 과정에서 느낀 고난, 두려움, 행복, 즐거움 그리고 믿음들은 나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라는 최무출 할머니의 말을 이어받아 그분의 막내아들이 남긴 다음 한마디는 행사장에 모였던 모든 이들의 다짐이 되었다. “어머니의 그 길을 제가 가겠습니다.” 모든 시간, 모든 세대는 이 다짐의 징검다리로 이어져야 한다. 참된 역사를 빚는 이보다 좋은 재료는 없다.

제갈인철 북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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