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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에 가담한 폴란드인, 희생자 코스프레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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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에 가담한 폴란드인, 희생자 코스프레를 하다

입력
2017.03.3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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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점령하 작은 시골 마을서

유대인 1600명 무참히 학살돼

가해국ㆍ피해국을 막론하고

“우리도 희생자인데…”

자기 정당화의 도구가 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비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15년 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 기념 연설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15년 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 기념 연설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1세기 민족주의의 큰 특징은 비극적 희생의 기억을 자기 정당화의 기제로 삼는다는 점이다. 제국의 민족주의든 식민지의 민족주의든 모두 가녀린 희생자의 이미지가 영웅적인 투사상을 대체하기는 마찬가지다. 9·11 테러의 기억에 기생하는 미국의 민족주의나 유고 내전 당시 세르비아의 자국 대사관에 대한 미군의 오폭(?)에서 ‘백년 국치’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중국의 민족주의를 보고 있노라면, 실소하지 않을 수 없다.

글로벌한 세상, 피해자 기억 경쟁을 불러오다

지구 사정을 잘 모르는 외계인이 아니라면, 지구 위의 민족 중 누가 감히 미국과 중국 민족에 대한 가해자임을 자처하겠는가? 미국과 중국마저 희생자라니, 인류 역사는 온통 희생자의 역사일 뿐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21세기 민족주의의 코드가 이처럼 투쟁적 영웅주의에서 수동적 희생자의식으로 이동한 배경에는 지구화와 더불어 새로 등장한 ‘전지구적 공공영역/시민사회’가 있다.

1990년대 CNN 등이 생생하게 전한 르완다의 제노사이드나 옛 유고슬라비아의 내전 당시 인종청소의 참혹상은 국경을 넘어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희생자에 대한 연민을 전지구적 시민사회에 불러일으켰다. 이른바 ‘내면적 지구화’ 과정이 일어난 것인데, 이에 따라 덩달아 홀로코스트나 식민주의의 폭력에 대한 비판적 기억문화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21세기에 이르러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경계를 벗어나 전지구적 이슈가 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그러나 ‘내면적 지구화’가 기억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이나 국제주의를 가져왔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누가, 어느 민족이, 어느 집단이 더 많이 희생되었는가?”를 놓고 서로 경쟁하고 싸우는 기억의 민족주의를 낳았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마치 희생자가 더 많을수록 그 민족주의가 더 정당성을 부여받고, 상대편의 희생을 긍정하면 자민족의 희생은 부정하는 것처럼 느끼는 기억의 제로섬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21세기 민족주의의 키워드는 ‘희생자’

21세기 민족주의의 코드가 ‘영웅’에서 ‘희생자’로 옮아가는 세계적인 이 추세를 나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고 명명한 바 있다. 동유럽 최고의 일간지이자 세계의 어느 유수한 일간지와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폴란드 신문 가제타 뷔보르차의 기자이자 창간 공신인 안나 비콘트가 쓴 이 책은 바로 폴란드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정조준하고 있다.

Anna Bikont

The Crime and the Silence: Confronting the Massacre of Jews in Wartime Jedwabne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15

비콘트는 ‘역사적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폴란드 출신 미국의 유대계 역사가 얀 그로스의 책 ‘이웃들’을 둘러싼 폴란드 사회의 첨예한 논쟁을 다루고 있다. 2000년 5월 19일 출간된 이래 한 해 동안 단 하루도 폴란드 언론에서 이 책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간 날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그로스의 책은 폴란드 사회에 편지풍파를 일으켰다.

‘이웃들’의 논지는 비교적 단순하다. 하지만 참혹하다. 1941년 7월 10일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 동부 변경 지역 예드바브네라는 인구 3,000명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약 1,600명의 유대인 주민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는데, 학살자는 흔히 믿는 것처럼 나치가 아니라 폴란드인 이웃들이었다는 것이다. 폴란드인 이웃들이 유대인 이웃들을 학살한 이 야만의 광경은 차마 옮기지 못할 정도로 끔찍하다. 그 참혹한 광경을 전한 슈무엘 바서쉬타인의 증언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지 고민할 정도로 그 살육 현장의 야만과 광기는 상상을 넘는다.

‘나치의 희생자’가 아닌 ‘유대인의 가해자’였다는 사실

비콘트의 꼼꼼한 기록과 다양한 인터뷰를 통해 이 끔찍한 야만의 과거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반응과 논쟁을 읽다 보면, 분노로 자꾸 책장을 덮게 된다. 폴란드 민족이 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희생자였다는 방어막 뒤에 숨어 예드바브네의 학살을 부정하거나 의미를 축소하고 심지어는 정당화하려는 자기변호의 논리들이 끊임없이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사안이 갖는 폭발성 때문에 취재를 허가하지 않다가, 예드바브네의 학살자 라우단스키 형제의 장형이 자기 가문의 애국주의적 전통을 들먹이고 또 자신의 가족은 항상 공공선을 위해 조국에 봉사해 왔다는 편지를 받고 발끈한 편집국장 아담 미흐닠이 결국 취재를 허가한 이야기부터가 초현실적이다. 폴란드 이웃들이 유대인 이웃을 학살했다는 주장은 폴란드 민족의 명예를 더럽히기 위해 악의적 세계여론이 날조한 거짓말이며 학살자는 독일인이었다는 예드바브네 시장 및 그 애국주의적 일파의 성명 앞에서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무의식 속에 있는 죄의식이 증오를 낳았다는 쿠론의 설명에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의 주역으로 운 좋게 살아남아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폴란드의 양심으로 도덕적 명망을 지켜 온 마렉 에델만의 증언 앞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치 친위대의 특수부대에 포위되어 어렵게 싸움을 이어가던 봉기 사흘째 되던 날, 게토 담 너머에서 그가 본 것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회전목마를 탄 젊은 여성들의 바람에 날리는 빨갛고 파란 드레스였다. 누가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 에델만의 얼굴에서 저자 비콘트는 물리적 고통을 읽었다고 전한다.

희생자의 얼굴로 가장한 가해자

예드바브네를 부정하는 폴란드인들은 에델만과는 다른 의미에서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평범한 폴란드인들이 나치의 희생자일 뿐 아니라 공범자였다는 사실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떠받쳐 왔던 도덕적 정당성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인류역사에서 유일한 원폭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일본이나 소련군의 성폭력과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의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독일에서만 위험한 것은 아니다.

개별적 가해자들은 나치 점령기의 동유럽에도 있고 일본 제국의 침략을 당한 아시아 각국에도 있다. 희생자라는 기억은 도덕적 성찰의 계기도 되지만, 뻔뻔스러운 자기 정당화의 논리가 되기도 한다. 가해자가 희생자로 둔갑하는 이 기억의 전도 현상은 지난 가을부터 서울에 있는 권력의 한복판에서도 잘 보인다.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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