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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이토록 멋진 ‘꽃할배’를 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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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이토록 멋진 ‘꽃할배’를 보았나

입력
2017.02.1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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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남포동 여용기 수석 재단사

뛰어난 패션감각으로 SNS 인기

한국의 닉 우스터라는 별명을 가진 부산 남포동의 여용기 재단사. 부산=전혜원 기자 iamjhw@hankookilbo.com
한국의 닉 우스터라는 별명을 가진 부산 남포동의 여용기 재단사. 부산=전혜원 기자 iamjhw@hankookilbo.com

“남포동의 ‘닉 우스터’(미국의 50대 후반 남성 패셔니스타) 라고요? 감사한 별명이지만 이젠 마스터 테일러(재단사)라고 불러주면 좋겠습니다.”

부산 중구 남포동의 고풍스러운 양복점에는 백발의 노신사 여용기(64ㆍ사진) 재단사가 있다. 말끔한 양복차림에 백발과 흰수염, 검은 뿔테가 묘한 조화를 이루는 그는 이미 인스타그램의 팔로워가 4만 명을 넘은 온라인상 인기인이다.

여씨는 이처럼 유명세를 누리고 있지만 한때는 기성복 시장에 밀려 바늘과 실을 놓았을 정도로 삶이 순탄치는 않았다.

그는 1971년 19세 나이로 중구 광복동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의류 전문가 김범두 선생에게 어깨 너머로 재단 일을 배웠다. 여씨는 “당시로는 170㎝의 훤칠한 키에 패션 감각이 뛰어난 멋쟁이였다”며 “일이 끝나면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곤 했다”고 김 선생을 회상했다.

여씨는 3년 뒤인 1974년 김 선생의 추천으로 부산의 한 양복점에 취직해 본격적인 재단사의 길을 걸었다. 29살이 된 1981년에 자신의 양복점을 개업했는데, 하루 다섯 벌의 양복이 여씨의 손 끝에서 탄생할 정도로 매장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한국의 닉 우스터라는 별명을 가진 부산 남포동의 여용기 재단사. 부산=전혜원 기자 iamjhw@hankookilbo.com
한국의 닉 우스터라는 별명을 가진 부산 남포동의 여용기 재단사. 부산=전혜원 기자 iamjhw@hankookilbo.com

그러나 1980년대 중반 기성복 시장이 인기를 끌며 그는 사업을 접었다. 그는 “기성복 시장에 대항해 데모까지 해보며 여러모로 안간힘을 써봤지만 시대적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맞춤복 시장이 기성복 시장에 크게 밀리기 시작하면서 그의 원치 않던 방황도 시작됐다.

바늘과 실을 놓은 기간 그는 식당과 건설업 현장, 공영주차장 주차관리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여씨는 “돌아가고 싶었지만 기성복 시장에 맞춤복이 들어갈 틈이 없던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재기의 기회가 찾아온 건 불과 3년 전이다. 여씨는 “결혼하는 아들의 양복을 손수 맞춰주고 싶어서 옷감을 떼러 갔다가 맞춤복 재단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옷감업체의 추천을 받아 현재 양복점 사장을 만나게 됐다”고 말했다. 여씨는 그 때부터 맞춤복 시장의 고객층을 다양화하는 고민을 거듭했다. 60~70대로 고령화된 맞춤복 고객의 연령을 20~30대까지 낮추는 과정이었다.

그는 젊은 층의 취향을 파악하기 위해 잡지를 읽고 온라인으로 이탈리아의 최신 트렌드를 연구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의 스파르파타 형태에 착안한 양복을 고안하기도 했다. 스파르파타 형태는 상의에 세 개의 단추를 붙이면서, 바지통은 줄이고 길이는 짧게 만들며 바지에 2개의 선이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여씨는 맞춤복뿐 아니라 자신의 스타일에도 변화를 줬다. 그는 이전까지 염색하던 머리를 백발로 두고 수염을 길러 맞춤 양복에 맞는 변화를 시도했다. 여씨는 “그렇게 단장하고 결혼식장에 갔더니 내 연령대 지인들이 ‘왜 이렇게 됐냐’고 안쓰럽게 쳐다보더라”고 웃으며 말했다.

한국의 닉 우스터라는 별명을 가진 부산 남포동의 여용기 재단사. 부산=전혜원 기자 iamjhw@hankookilbo.com
한국의 닉 우스터라는 별명을 가진 부산 남포동의 여용기 재단사. 부산=전혜원 기자 iamjhw@hankookilbo.com

SNS와 입소문을 타면서 여씨가 일하는 양복점에는 멀리 강원도에서 젊은 손님이 찾기도 하고 딸의 손을 잡은 아버지가 오기도 한다. 그는 “이전에는 서울에서 양복을 맞췄다는 40~50대로 보이는 중소기업 CEO가 최근 매장에 오기도 했다”며 “차츰 SNS와 입소문을 타고 매장을 찾는 손님들이 늘고 있다”고 좋아했다.

여씨가 일하는 양복점의 상호는 상속과 승계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에르디토’(Eredito)다. 여씨는 “나도 나이를 더 먹으면 일하기 힘들어질 것 같다”며 “제자를 두고 내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라고 말했다.

부산=정치섭 기자 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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