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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주면 뭐한데유, 돌아서면 마르는디” 타는 農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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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주면 뭐한데유, 돌아서면 마르는디” 타는 農心

입력
2017.06.06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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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강수량 30㎜… 저수지 바싹 말라

작물 심기 전에 지하수 실어와야

심기 전, 심으며, 심고 나서 살수

“마실 물로 악 써 가며 농사 지어”

고지대 마을은 아예 농작 포기

가뭄이 극심한 충남 서산시 운산면의 한 농지에서 4일 농민 김모씨가 물을 뿌리고 있다.
가뭄이 극심한 충남 서산시 운산면의 한 농지에서 4일 농민 김모씨가 물을 뿌리고 있다.

“이번 주말은 시간 좀 되냐? 안 되면 헐 수 읎구~”

3주째다. 통 먼저 전화하는 일 없던 아버지가 매주 수요일만 지나면 아들의 주말 일정을 묻는다. ‘안 되면 안 되는데’로 들리는 충청도말 “안 되면 헐 수 읎구”에는 충청 일대를 중심으로 전국이 말라가는 가뭄에 시커멓게 타버린 농심(農心)이 스며있다. “주말에 갈 게유” 아들의 대답에 아버지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그려, 밭에 물 좀 대자. 가뭄 때문에 승질(성질)나서 못 살겄다.”

주말을 앞둔 2일 밤 확인한 날씨예보는 ‘전국 쾌청, 나들이 좋아요.’ 농민들에겐 ‘이번 주말도 쉬긴 글렀어요’라 받아들여진다. 3, 4일 이틀간 묵은 충남 서산시 운산면 곳곳에선 가뭄과의 사투가 벌어졌다. 최근 두 달 사이 동네에 내린 비는 모두 합쳐야 30㎜안팎이라는 게 주민들 얘기. 같은 기간 충남 전체 강수량이 평년의 절반 남짓(55.2%)인 90.5㎜인 걸 감안하면, 현지의 절박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겠다. 작물 심고 잡초 매기도 모자란 시간에 물까지 대야 하는데, 먹을 물마저 말라가니 온 동네가 난리다.

가뭄이 극심한 충남 서산시 운산면에서 4일 한 농민이 밭에 뿌릴 지하수를 물탱크에 담고 있다.
가뭄이 극심한 충남 서산시 운산면에서 4일 한 농민이 밭에 뿌릴 지하수를 물탱크에 담고 있다.

1,600여㎡(약 500평) 규모 밭에 특용작물 지황을 심기로 한 4일, 작업을 위해 새벽 6시부터 찾아간 곳은 밭이 아닌 동네 지하수 펌프시설이다. 트럭에 실린 2톤 규모의 물통에 물을 채운 뒤, 갈아놓은 밭으로 가져가 뿌려야만 작물을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자가 농업용 분무기로 밭 위에 물을 뿌리면, 아버지와 일손을 돕는 동네 아주머니 3명이 젖은 땅에 작물을 심는 식으로 작업은 진행됐다.

“끝났슈~” 30분 가량 열심히 물을 뿌린 뒤 돌아섰는데, 허탈하다. 처음 물을 준 곳의 흙은 이미 바삭바삭할 정도로 말라버렸다. “물 주면 뭐 한데유, 돌아서면 다 마르는디~” 아들의 투정에 아버지는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거라도 적셔놔야 (작물을) 심지.”

작물을 심기 전 한 번, 심으면서 한 번, 심고 나서 한 번씩 땅을 적시려면 물통을 서너 번 반복해 채워야 했다. 아버지는 “물 받아 나르고, 뿌리는 시간만 아껴도 다른 일을 실컷 할 수 있다”고 푸념했다. 일손을 거들던 동네 할머니는 “마실 물로 농사짓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될 일”이라며 거든다.

농가가 식수로 쓰는 지하수까지 끌어다 논밭에 물을 주는 건 이 동네 물 공급을 조절하는 고풍저수지가 다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6일 한국농어촌공사에 따르면 총 저수량이 836만톤인 이곳의 저수율은 현재 5%로, 물을 더 이상 뺄 수 없는 사수량(死水量)에 가까웠다. 저수지 인근 주민 최봉진(54)씨는 “1975년 지어진 뒤로 이렇게 마른 적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저수지는 바닥을 드러내다 못해 풀이 자라기 시작했다.

4일 가뭄이 극심한 충남 서산시 운산면의 고풍저수지가 바짝 말라있다.
4일 가뭄이 극심한 충남 서산시 운산면의 고풍저수지가 바짝 말라있다.

고지대 마을은 그나마 저수지 혜택도 누리지 못해 아예 작파했다. 해발 150m에 위치한 와우리 주민들은 이미 지난 4월부터 농경지 10만㎡ 가량의 농작을 포기했단다. 운산면에서 몇 집 농사라도 살려보자며 지하수 관정을 뚫어보려 힘을 보탰지만 헛수고였고, 서산시에서 지원한 살수차 10대의 물도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그마저도 마르자, 굴착기를 동원해 다 마른 냇가를 파내 겨우겨우 하루치 물을 구했다. “이 물 마를 때까지 비 안 오면 올해 농사 접어야지 뭐.” 농민 장모(67)씨의 주름이 깊어졌다. 농작물 대신 잡초만 무성한 밭에선, 주민들 속을 모르는 동네 개들만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장씨는 “이렇게 악을 써가며 농사를 지어도 가을 되면 또 걱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이유인즉슨 20년째 제자리인 쌀값 때문. 97년에도 쌀 한 포대(80㎏) 값이 10만원 안팎이었는데, 지금도 그 정도 가격이란다. 그 사이 국내 쌀 소비는 크게 줄어든 반면, 해외 농산물 개방은 늘었다. 정씨는 “‘정책실패’보다 정부의 무관심과 방관에 지쳤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제발 농업을 경시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당장 논밭에 댈 물도 없는 처지에, 땅도 속도 타 들어가는 상황에 그간의 서운함까지 곁들이는 건 그만큼 농촌 상황이 절박하다는 넋두리일 터. 기상청 예보에 단비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6일도 비는 운산면 일대에 점심때 찔끔, 저녁 때 조금(강수량 5㎜ 이내) 흩뿌리다 말았다. 이날 비가 촉촉히 내린 서울에서 보면 딴 나라 얘기로 들리겠다.

서산=글·사진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한 반려견이 잡초만 무성한 빈 농지 위를 뛰어다니고 있다.
한 반려견이 잡초만 무성한 빈 농지 위를 뛰어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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