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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사랑이 몸부림칠 때

입력
2017.10.23 15:55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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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을 읽으면 그 등장인물들이 현실에서 한 뼘쯤 떨어져 있는 사람들 같이 느껴진다. 비현실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현실에게 우아함을 한 수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 같이 느껴진다는 의미다. 그런 소설을 만나면 그 주인공들의 우아함을 닮고, 그것으로 내 앞의 현실을 끌고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천운영 소설 ‘엄마도 아시다시피’를 읽고 사람이 사람을 어디까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주인공은 모친상을 당해 슬픔에 빠져있는 중년 남자다. 번듯한 보험회사의 부사장인 그는 매우 단정한 일상을 지내왔다. 그러나 엄마가 떠난 날부터 그의 일상은 여기저기서 나사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구두 주걱이 버스정류장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거나, 매일 업무 시작 전 읽던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그는 자기도 모르게 “엄마가 없어… 난… 고아야”라고 중얼거린다. 그는 깜짝 놀라 그 말을 다시 삼켰지만 삼킨 그 말은 울음으로 분출했다. 그때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울어서 쉬어 버린 자신의 목소리였고, 생전의 엄마 목소리와 꼭 닮아 있었다. 남자는 숨겨진 보물을 찾은 아이처럼 기뻐한다.

그는 그 쉰 목소리를 잃지 않기 위해 우는 일을 그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계속 울어지지 않아 끙끙대고 있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울지 말고 슬픔을 노래 해라.” 남자는 노래방에 가서 노래 한 곡을 반복해서 부른다. 엄마가 좋아하던 늙은 샹송 가수의 노래다. 엄마는 그 가수를 “슬픔을 간직한다는 게 뭔지 아는 목소리”라며 좋아했다. 엄마의 노래는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되살아났다. 그는 가끔 엄마의 유품을 꺼낸다. 한복도 입어보고 립스틱도 발라 본다. 엄마는 늘 그의 곁에 있고 그는 엄마 생전의 일상을 회복했다.

엄마의 첫 기일이 되어 가족들이 모인 저녁, 가족들 각자가 가진 사랑의 모습은 서로 충돌한다. 제사상이 차려졌는데도 남자는 방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는다. 형제들이 거듭 불러내어 등장한 남자는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에는 가발, 눈에는 돋보기를 쓰고 있다. 그리고 평생 외롭고 쓸쓸했던 엄마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형제들은 난리다. 엄마를 그리워한다는 건 알겠지만 이건 아니라며 화를 낸다.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부른 남자는 감동의 무대를 마친 늙은 여가수처럼 휘청거리며 엄마의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문을 잠근 그는 엄마의 자리에 앉아서 누군가 다녀간 것 같은 고요한 밤을 보낸다.

이 무슨 비현실적인 이야기인가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화보다 추상화가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마치 분통이 터지거나 벅찬 환희에 찬 사람이 말을 못 꺼내 답답해 하는 표정을 보며 우리가 더 많은 말을 들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조금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담은 소설은 현실을 더 잘 보여주는 힘이 있다.

사랑이 인생 최고의 가치라고 모두가 말한다. 사랑이 그리도 절대적 가치를 가진 거라면, 왜 목숨을 걸고 인생을 걸고 그것을 우리 몸의 혈액으로 만들려고 애쓰지 않는가. 사랑 때문에 몸부림을 치지는 못한다 해도, 적어도 사랑으로 인해 몸부림을 치는 사람을 이해의 눈으로 볼 수는 없는 걸까. 사랑은 타인의 영혼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 영혼을 구석으로 밀어내는 일이다. 그래서 당연히 제정신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젠가 남자의 엄마가 말했었다. “괜찮다. 엄마는 죽지 않는다. 그게 엄마다.” 엄마가 남긴 말처럼 엄마는 남자의 몸부림 속에 살아있다. 남자의 몸부림은 떠난 엄마를 자기 몸에 간직하는 일. 언제고 다시 불러 내는 일. 그래서 함께 사는 일. 영원히 함께 사는 일. 결국 우리 모두가 죽음을 넘어서고 생의 무의미를 넘어서는 일.

제갈인철 북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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