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황영식
주필

등록 : 2015.08.06 18:35
수정 : 2015.08.07 07:22

[황영식의 세상만사] 해바라기 행정

등록 : 2015.08.06 18:35
수정 : 2015.08.07 07:22

돌연한 목동 행복주택사업 취소

님비에 굴복했다는 인상과 달리

경직된 정책의 필연적 좌절이다

김수영 구청장, '목동행복주택지구 지정 취소 환영'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목동행복주택 비상대책위원회 사무실 앞에서 진행된 ‘목동행복주택 지구지정취소 기자설명회’에 참석한 김수영 양천구청장이 국토교통부의 결정을 환영한다는 내용의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

‘58년 개띠’라는 말이 있다. 사상 최초로 한 해에 100만 명 넘게 태어난 인구통계적 특성에 초점을 맞춘 말이었겠지만, 점차 그들의 독특한 사회적 경험에서 나왔을 집합적 의식ㆍ행태 특성까지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확장돼 왔다.

고교 배정을 계기로 스스로가 ‘58년 개띠’의 일원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중3 진급 직후 갑자기 고교 입시가 없어졌다. 이듬해 추첨으로 배정받은 학교가 영등포구의 신설 K고였다. 안양천 제방과 붙은 저지대에 급히 만든 학교였다. 불도저가 밀어 놓은 질척거리는 땅에 교사(校舍)만 덩그러니 서 있던 첫 모습은 지금 떠올려도 황당하다.

애초에 학교를 세울 만한 땅이 아니었다. 하천부지라는 내력 그대로 운동장은 연중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비가 조금이라도 내리면 이내 진창이 됐다. 고2 때까지 모래와 마사토를 리어카로 실어날라 운동장을 덮는 작업에 수시로 동원돼야 했다. 운동장만 문제가 아니었다. 안양천 제방과 닿은 쪽을 뺀 나머지 3면에는 공장이 빼곡했다. 크고 작은 공장에서 뿜어져 나온 매연 때문에 체육 수업이 자주 중단됐다. 오래 달리기는 물론이고 100㎙ 달리기도 쉽지 않았다. 저기압으로 매연이 낮게 깔리는 날은 창문을 꼭꼭 닫아야만 교실 안에서의 수업이 가능할 정도였다.

유신 치하의 엄엄한 시절에 이례적으로 자주 학생시위에 나섰던 것도 그 때문이다. 고1 때 ‘육영수 여사 서거’를 맞은 한 차례의 ‘관제 데모’를 제외한 나머지 여러 차례의 ‘K고 시위’의 한결 같은 요구는 “공장을 옮기라, 아니면 학교를 옮기라!”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런 ‘고난의 행군’은 권력의 뜻을 받드는 게 최우선 과제였던 교육당국의 자세 탓이었다. 동갑내기인 ‘대통령의 아들’을 위한 제도라는 소문이 파다했을 만큼 고교평준화 제도는 급히 도입됐다. 효율적 숫자조절 장치인 입시를 없앤 마당에 크게 숫자가 불어난 ‘58년 개띠’ 고교 진학 희망자를 받아들일 학교를 미리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 서둘러 공립학교를, 그것도 공장지대 하천부지 공터에 세우겠다는 교육당국의 정책 은 꽤나 ‘합리적’이었다. 그 학교에 다닐 학생들이 어떤 고통을 겪어야 할지를 안중에 두지 않은 결정적 하자는 당시의 사회상황이 덮어주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흘렀다. 민주화와 지방자치제 등 발전적 변화가 이뤄지고 정권교체도 잇따랐다. 오랫동안 청와대로 쏠렸던 행정의 눈길도 정책 수용자인 국민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만하다. 이런 기대와는 달리 아직 경직된 행정, 해바라기성 행정의 실태(失態)는 말끔히 지워지지 않았다. 가까운 예가 목동 행복주택 사업의 백지화다.

국토해양부는 지난달 22일 목동 행복주택 시범지구 지정을 해제했다. 2013년 지구지정과 동시에 불붙은 주민과 자치체의 반대로 난항을 겪어온 사업이지만 해제 시점과 형식이 묘하다. 시범지구 지정 과정의 절차적 정당성을 따지는 행정소송에서 지난해 12월의 1심에 이어 2심 승소를 얻어낸 게 지난달 9일이다. 보름도 안돼 지구지정 해제했으니 “주민 반대가 얼마나 심각했으면 재판에 이기고도 정부가 포기해야 했을까”하는 의문이 들끓고, 지역이기주의나 주변 집값 하락 우려 등에 눈길이 쏠릴 만하다. 그러나 그 동안의 경과를 찬찬히 살펴보면 후보지의 제반 여건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추진한 ‘행정의 과오’ 색채가 훨씬 짙다.

목동 유수지는 서울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데다 주변의 상습 침수를 해소하기 위한 대심도 빗물저류 터널의 종점이어서 규모 축소가 불가능하다. 더욱이 대심도 터널 공사 과정에서 확인된 유수지의 토질은 대형건축물에 부적합하다. 건축토목 기술로 난점을 극복하더라도 그에 따른 막대한 비용증가는 애초의 주된 고려였을 경제성을 무색하게 한다.

왜 이런 곳을 후보지로 선정했을까. 공교롭게도 목동 유수지는 오목교를 사이에 두고 K고와 대각선으로 마주본다. 40년이라는 세월의 격차, 교육부와 국토해양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주력 사업에는 무조건, 서둘러, 앞장서려는 행정의 경직성 외의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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