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재학
논설위원

등록 : 2017.12.06 15:57
수정 : 2017.12.06 17:47

[메아리] 보수가 변해야 불평등 완화된다

등록 : 2017.12.06 15:57
수정 : 2017.12.06 17:47

6일 새벽 국회 로텐다홀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내년도 예산안 표결 처리에 항의, ‘미친 예산 결사 반대’ ‘사회주의 예산 반대’ 등의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민생은 시장 아닌 정치가 결정

보수 우경화가 경제 불평등 확대

지금 시대정신은 진보가치 수용

트럼프 감세안이 며칠 전 미 의회를 통과했다. 현행 35% 법인세를 신흥국 수준인 20%로 낮추고 ‘오바마 케어’의 핵심인 전 국민 건강보험 의무가입 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이다.

미 공화당은 증세나 규제를 병적으로 싫어한다. 의료보험 실업수당 최저임금 같은 사회보장을 ‘불필요한 사회주의 제도’로 여긴다. 백인 부유층이 공화당을 지지하는 이유다. 그들에게 세금은 경제성장을 막는 독소요, 의료보험은 가난한 사람을 나태하게 만드는 마약이다. 복지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돕기 위해 부자 돈을 빼앗는 행위다. 1980년대 이후 공화당의 우경화가 만든 미국 모습은 끔찍하다. 세계 최고 수준인 소득 불평등은 계속 커지고 있다. 소득 상위 1%가 국민총소득의 22%를 점한다. 국민에게 기본 의료보험조차 제공하지 않다 보니 남성 성인사망률이 미국보다 가난한 49개국보다 높다.

공화당이 항상 그랬던 건 아니다. 미국 역사에는 극심한 불평등 시기가 또 있었다. 산업화가 급속히 이뤄진 1870~1930년대 ‘길었던 도금(鍍金)시대’다. 부와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됐고 대중은 분노했다. 불평등은 체제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정치권이 개혁에 나섰다. 공화당은 민주당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소득세ㆍ상속세 인상으로 빈부격차가 눈에 띄게 줄었다. 의료보험 최저임금 등 국가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복지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니 진보주의자도 공화당 아이젠하워를 지지하는 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1950~70년대 미국은 중산층 국가의 이상적 모델이었다. 역사상 가장 평등하고 평화로운 시대였다. 초당적 제휴가 만들어 낸 결과였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은 80년대 들어 급진적 보수주의 운동이 공화당을 장악해 진영 갈등이 심해지면서 사회보장제도 근간이 흔들리고 소득격차가 확대됐다고 말한다. 그의 지적은 국내 정치현실 분석에도 유용하다. 압도적 보수 우위였던 군사정권 시절에는 정쟁(政爭)이랄 것도 없어 소득분배가 비교적 잘 이뤄졌다. 운동권ㆍ시민 세력이 성장해 공세적 진보와 완고한 보수 구도가 형성되면서 격차사회가 본격화했다. 시장 아닌 정치가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한 주범인 것이다.

흔히 진보는 변화와 개혁, 보수는 현상유지를 바란다고 한다. 촛불혁명 이후 여야 행태를 보면 맞는 성싶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의 진보는 독재정권과 싸우던 운동문법이 체질화한 탓인지 도덕적 아집이 강한 편이다. 선악 이분법과 가치에 매몰돼 유연성이 떨어진다. 가진 게 많은 보수는 집권욕이 남다르다. 절실한 만큼 변신에도 능하다.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이념적 스펙트럼도 다채롭다. 영국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는 노동당보다 더 많은 변화와 혁신을 시도했다. 북한을 적이 아닌 동반자로 규정한 첫 대통령은 원조보수 노태우다. MB는 녹색성장을, 박근혜는 경제민주화를 부르짖었다. 진정성 있는 대안 제시였든 쇼 차원이었든, 기득권을 지키려 진보의 가치를 빌려 온 것이다.

문재인 정부 첫 예산안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최저임금 인상분 지원, 아동수당 도입 등 복지예산이 크게 늘었다. 26년 만에 법인세도 인상됐다. 보편복지 마중물이 마련됐다는 평가다. 자유한국당은 본회의 표결에 불참하며 격렬히 저항했다. ‘사회주의 예산 반대’라는 피켓도 들었다. 예산안뿐만 아니다. 사사건건 새 정부 발목잡기에 혈안이다. 탄핵과 대선 패배에도 자기 반성 없이 불평등과 특권을 수호하는 강경 보수로 치닫고 있다.

보수의 토양이 변했음을 한국당만 모르는 듯하다. 촛불혁명과 70%를 넘는 문 대통령 지지율은 합리적 보수가 진영 감옥에 갇힌 낡은 보수를 외면했다는 방증이다. 우리 불평등 수준은 미국 못지않다.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또 한 번의 도금시대가 변곡점을 향하고 있다. 시대정신은 진보 가치 수용을 통한 불평등 완화다. 한국당은 ‘길었던 도금시대’를 해소한 공화당의 양보와 포용의 정치를 배워야 한다. 그래야 보수가 살고 국민 삶이 편안해진다.

고재학 논설위원 겸 지방자치연구소장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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