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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블랙리스트와 분노

입력
2017.01.2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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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실재했다. 하지만 이 존재 여부와는 관련 없이 이미 ‘문화계’는 정부의 예술적 검열이나 지원의 편중을 눈에 띄게 느껴 왔다. 심지어 이는 다분히 체계적이었고, 때로는 뜬금없었다. 여기서 ‘문화계’는 전형적인 ‘윗선’의 체계적 개입과, 때로는 갑작스러운 지시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최순실 게이트와 더불어 이 리스트가 공개되었다.

짐작할 수 있었음에도, 이 실재하는 명단의 디테일은 가히 충격적이다. 1만 명 가까운 사람의 이름과 그들을 배척해야 하는 구체적 이유와 실제로 그들을 배척한 증거가 발견되었다. 이는 시사하는 바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문학을 포함한 대부분의 예술은 실존하는 세상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신만의 견해나 해석으로 재창조하는 데 바탕을 둔다. 그 예술가가 세상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긍정적 면을 찾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대개 불합리하거나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맹점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의 본질은 현실 안주가 아닌 세태 비판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정권이 보수적이건 진보적이건 간에 비슷한 경향을 띤다. 동서고금의 문학이나 고전을 통틀어 보면, 지금 우리네 현실이 태평성대이며 자신은 현실에서 아무런 고뇌나 좌절 없이 배부르다고 주장하던 이름난 예술가가 있었던가. 그런 작품은 애초에 역사에 남을 예술로 성립되기 어렵다.

여기서 민주주의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신념을 가지는 것도 있지만, 타인의 말을 듣고 입장을 이해하는 것도 있다. 어차피 100% 의견 일치는 민주주의에서는 일어날 수도, 일어나서도 안 된다.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소수의 의견을 귀담아들으며 대의적으로 나라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현대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인 우리나라의 헌법은 21조에 언론ㆍ출판의 자유와 22조에 학문ㆍ예술의 자유를 언급한다. 이 자유가 없다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것이다. 또, 정치인이 자기와 의견이 다른 국민을 탄압한다면 그것은 독재를 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니 ‘블랙리스트’라는 발상부터 이미 그들을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치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예술가적 본질은 현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하면서 다른 시점이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예술가의 작품은 정치인의 현실인식과 불일치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정치인은 이를 비판적인 예술적 시각의 하나로 참고하거나 받아들이며 자기 일을 묵묵히 수행하면 될 일이다. 이것이 헌법을 수호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교양 있는 정치인이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증거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자들'의 의견을 듣지 않는 것을 넘어서, 자신이 가진 모든 방법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말살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예술에 대한 이해라곤 없고, 자신의 권력을 지탱하는 것 외에는 뵈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이나 서구에서 전해지는 예술, 이들은 현실이 태평성대라고 주장하는가? 당연히 아니다. 이 예술에는 훨씬 날카롭고 세태 비판적인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목소리를 균형적으로 수용하며 널리 퍼뜨릴 수 있는 나라가 선진국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번 증거에서 우리나라가 행한 바는, 정확히 정반대이다.

이렇게 자국의 문화예술을 통제하는 나라는 보통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채택한 국가다. 왜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그들을 닮으려고 했을까. 그것은 바로 이 체제의 유지가 기본적으로 대국민 사상 통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 블랙리스트도, 이를 만든 사람들이 국민을 완벽히 자신의 생각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2017년까지 민주주의 국가에서 몰래 행해진 일이었다니, 도저히 분한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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