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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인터뷰] “헬조선의 지형도에도 여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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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인터뷰] “헬조선의 지형도에도 여성은 없다"

입력
2017.07.12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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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헬페미니스트 선언’을 펴낸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가 책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윤 교수는 지옥과 페미니스트를 합친 ‘헬페미니스트’들이 삼포세대로 대변되는 헬조선의 지형도에서조차 배제됐다고 주장했다. 배우한 기자
책 ‘헬페미니스트 선언’을 펴낸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가 책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윤 교수는 지옥과 페미니스트를 합친 ‘헬페미니스트’들이 삼포세대로 대변되는 헬조선의 지형도에서조차 배제됐다고 주장했다. 배우한 기자

‘헬조선의 시민은 누구인가’. 연애와 결혼, 출산의 기회를 박탈 당한 청년들을 일컫는 ‘삼포세대’와 그들이 사는 국가 ‘헬조선’은 지난 수 년 간 이 사회를 그린 가장 적나라한 풍속도인 듯 했다. 그 속에서 울부짖는 청년들의 성별이 하나같이 남자라는 건 최근에야 제기된 지적이다. 결혼과 출산을 ‘기회’로 삼을 수 있는, 따라서 ‘박탈’ 당해선 안 될 권리라 외칠 수 있는 주체가 남성에 한정됐다는 점에서,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헬조선 담론은 전복 서사가 아닌 봉합 서사”라고 지적했다.

“헬조선에서 포기란 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부계혈통적 가족 구성을 통해 기득권을 획득해온 남성입니다. 이들의 박탈감은 분배되어 마땅한 자원으로서의 여성을 사유할 수 없는 데서 옵니다. 반면 이 나라의 여성이 결혼과 출산을 통해 얻는 건 가부장제에 다시 머리채 잡혀 들어가는 일뿐이에요. 헬조선의 지형도엔 이런 것들이 삭제돼 있어요. 거기서 그리는 여성의 모습은 남성의 자원을 착취하는 ‘무임승차자’입니다.”

윤 교수는 신간 ‘헬페미니스트 선언’에서 최근 인터넷 상에서 도는 ‘헬페미니스트(지옥을 뜻하는 헬과 페미니스트의 합성어)’란 용어를 집중 조명했다. 그는 이 사회의 지반을 뒤엎고 다시 짤 수 있는 자들은 빼앗긴 기득권을 요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지도에서 제외된 자들, 잃을 것이 없는 자들, 그래서 더 이상 설득을 시도하지 않는 ‘헬페미’들이라고 주장한다.

윤 교수는 헬페미의 특징을 “올바르지 않은 언어”에서 찾았다. 2015년 메르스갤러리에서 시작된 소위 ‘메갈’들의 미러링(여성을 향한 남성들의 폭력적인 언어를 거울로 반사하듯 남성들에게 되갚는 행위)부터, 최근 트위터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른바 ‘트페미’들의 언어까지 모두 여기 포함된다. “처음 헬페미들이 입을 열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여자가 아닐 거라고 추정했어요. 우리가 알던 여자의 언어가 아니었던 거죠. 욕설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들이 남성중심사회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고심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늘 말하는 자에게 ‘알아 듣게’ 얘기하라고 요청하지만, 듣는 자에겐 한 번도 들을 귀를 가지라고 요구한 적이 없어요.”

그는 책에서 헬페미들의 언어가 화풀이식 발언에 그치지 않고 자궁 대신 ‘포궁’, 출산율 대신 ‘출생률’ 등 가부장적 언어들을 정죄하고 대체어를 생산하는 데 주목했다. 헤어진 연인과의 성관계 영상을 동의 없이 온라인에 유포하는 행위를 뜻하는 ‘리벤지 포르노’는 헬페미들에 의해 ‘디지털 성범죄’로 바뀌어야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복수(리벤지)는 범법행위를 연인관계에서의 사적 갈등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포르노 역시 여성을 성적으로 보는 남성중심적 단어죠. 인상적이었던 건 리벤지 포르노라는 말이 널리 쓰이기도 전에 비난을 받았다는 거예요. 새로운 단어를 소화하기도 버거운 시점에서 문제를 찾고 바꾸는 이들을 보면서, 학자로서 헬페미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이론적으로 의미화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윤 교수는 최근 혐오란 단어가 화두에 오른 것과 관해, “혐오와 분노는 다르다”며 헬페미를 ‘혐오 세력’으로 보는 시각에 반대했다. “혐오는 싫어하는 감정이 아니라, 약자를 분류하고 낙인 찍어 전체 지형도에서 배제하는 매커니즘입니다. 누가 누구를 혐오한다고 하면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떠들지만, 지금 주류사회의 상식, 예절, 질서의 바탕이 혐오예요. 혐오의 얼굴은 태연합니다. 그 얼굴은 분노하지 않아요. 헬페미는 분노하는 사람들입니다. 분노를 동력으로 새로운 세기의 베틀을 짜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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