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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구달 박사와 덤블도어 교장

입력
2018.05.15 11:13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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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은은히 울리고 있는 병실. 의사는 넴뷰탈(펜토바르비탈나트륨)과 신경안정제를 혼합한 정맥주사를 혈관에 꽂힌 튜브에 주입했다. 정맥주사의 밸브는 잠긴 상태였다. 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누워 있던 남자가 스스로 밸브를 열었다. 그리고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 지난 5월10일 낮 12시30분 스위스 바젤의 라이프 사이클 클리닉에서 벌어진 광경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밸브를 연 사람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최고령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104세). 그는 안락사를 선택했다.

구달 박사가 안락사를 위해 고령에도 불구하고 호주에서 스위스까지 먼 여행을 해야 한 까닭은 호주에서는 안락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안락사는 우리나라에서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와 호주에서 가능한 것은 안락사가 아니라 존엄사다.

존엄사는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환자가 본인이나 가족의 동의로 연명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연명 치료란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같은 것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도 영양분과 물, 산소와 진통제는 계속 투여되어야 한다. 당연하다. 죽는 순간까지도 존엄해야 하니까. 존엄사는 우리나라에서도 올해부터 가능해졌고 많은 나라에서 허용된다.

이에 비해 안락사는 죽음을 원하는 사람이 의사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다. 조력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조력 자살이다. 현재 안락사가 가능한 나라는 베네룩스 3국과 스위스, 콜롬비아, 캐나다를 포함해서 모두 여섯 나라다. 영국은 사실상 묵인하고 있고 미국에서는 오리건주만 허용하고 있다.

스위스에서만 매년 1,400건 이상의 안락사가 일어나고 있는 정도인데 데이비드 구달 박사가 특별히 뉴스로 다뤄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호주 최고령 과학자이고 식물생태학의 권위자여서가 아니다. 그는 불치병에 걸리지 않았는데도 단순히 고령을 이유로 안락사를 택한 최초의 사례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례는 얼마든지 더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데이비드 구달 박사의 안락사, 그러니까 조력 자살에 대해 비난하는 글을 단 한 편도 읽지 못했다. 그의 죽음은 ‘평화롭게’, ‘환희의 송가를 들으며’, ‘영면에 들다’와 같은 호의적인 문구로 치장되었다. 왜 그럴까? 그가 100년도 더 살아서? 그 정도면 충분히 살았으니까? 과학적인 업적도 충분히 남긴 사람이 아프지도 않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는 상태에서 평온하게 죽으니 ‘호상’이란 말인가?

데이비드 구달 박사는 죽음을 앞두고 행한 기자회견에서 “난 더 이상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 내일 삶을 끝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마치 자신이 어느 정도 힘이 빠지고 공동체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저 벌판에 나가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떠올리게 한다. 동물들도 이 방식을 택한다. 죽음이 가까이 오는 것을 느낀 동물들은 무리를 벗어나 스스로 잡혀 먹힌다. 코끼리는 무덤으로 삼을 만한 곳을 찾아 간다. 데이비드 구달 박사는 야생 동물처럼 죽음을 선택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정말 호상 맞네!

우리나라의 모든 사망 가운데 자살이 차지하는 비중은 5위다. 암, 심장질환, 뇌혈관질환, 폐렴 다음이다. 당뇨병, 교통사고, 산업재해보다도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략 36~40분 사이에 한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하는 이들에게 호의적인 경우는 거의 없다. 자식이 자살을 하면 쉬쉬하며 장례를 조용히 치르거나 자살한 친구의 장례식장에 모인 친구들은 “나쁜 자식”이라며 안타까워한다. 노인들의 자살은 병사로 치장된다.

자살은 외진 곳에서 일어난다. 자살하는 사람은 외롭게 죽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형법 제252조 2항에 따르면 자살하려는 사람을 보고도 그대로 두면 자살교사방조죄가 되어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은 생명의 당연한 과정이다. 그렇다면 죽음마저도 헌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행복한 죽음도 추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언젠가 삶이 지루하고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오래 살고 싶다. 여기에 대해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마법학교 덤블도어 교장선생님은 이렇게 말하신다. “죽음이란 또 하나의 위대한 모험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장수와 돈을 선택하지. 문제는 인간들이란 꼭 자신에게 이롭지 못한 것을 선택하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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