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치안유지법

입력
2017.05.11 12:00
0 0

[기억할 오늘] 5.12

1925년 오늘 일제 '치안유지법'이 시행됐다. 독립운동 탄압의 최대 무기였던 그 법은 45년 미군정에 의해 폐지됐고, 48년 한국 정부에 의해 국가보안법으로 부활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사이버전시관 자료.
1925년 오늘 일제 '치안유지법'이 시행됐다. 독립운동 탄압의 최대 무기였던 그 법은 45년 미군정에 의해 폐지됐고, 48년 한국 정부에 의해 국가보안법으로 부활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사이버전시관 자료.

1925년 5월 12일 일제의 ‘치안유지법’이 시행됐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시민들이 저 법에 의해 투옥되고 고문 당하고 사형 당했다. 총 7개조인 법의 제1조는 “국체를 변혁하거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였다. 처벌 조항은 3년 뒤인 28년 개정되면서 최고 사형으로 강화됐고, 41년 개정으로 총 65개조로 정밀하고 집요해졌다.

법의 모태는 23년 간토(關東) 대지진 직후 혼란기의 긴급칙령이었지만, 뿌리에는 1910 중국 신해혁명과 17년 러시아 혁명이 있었다. 군주정 폐지 공화혁명과 공산주의 혁명. 법의 주 목적도 천황제 유지와 공산주의 배격이었다. 조선 독립운동도 제국 일본의 국체를 흔드는 중대 범죄였다.

사상범을 전담하는 특고경찰(고등계)이 신설됐고, 중앙정보위가 설치됐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고, 국내외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 및 조직원들도 줄줄이 투옥됐다. 박헌영, 박열, 윤동주, 안창호…, 이준식이 쓴 ‘일제 강점기 사회와 문화’에 따르면 28~38년 10년 사이에만 2만8,000명이 검거됐다. 치안유지법은 전후인 1945년 10월 연합군 최고사령부령으로 폐지됐다. “시민의 정치ㆍ사회ㆍ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악법이라는 게 폐지 사유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여수ㆍ순천사건’ 직후인 1948년 12월 1일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본 따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제정법률 제1조는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는 좌에 의하여 처벌한다”는 거였다. 수 차례 개정 끝에 91년 5월 개정된 현행 법령 1조는 “법의 해석 적용은(…) 목적 달성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며”(2항)라는 단서를 달았다.

유엔 인권사회이사회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국가인권위원회를 비롯, 시민 사회단체의 법 개정ㆍ폐지 요구가 이어져왔고, 형법 등 기존 법령으로도 국가보안법의 법익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다는 지적이 빗발쳐왔다. 하지만 역대 정부와 국회는 법에서 ‘인권침해 소지’를 없애지도, 법을 폐지하지도 못했다. 국가보안법 폐지가 안보 포기와 동의어라 여기는 유권자들을 두려워하는 탓일 테다.

최윤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