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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가면을 벗고… 온몸으로 저항한 탈식민주의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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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가면을 벗고… 온몸으로 저항한 탈식민주의 대부

입력
2016.02.1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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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領 앤틸리스 제도서 출생

나치 점령하 항독 전쟁 참전 후

식민지 흑인의 모멸적 현실 자각

의학 박사로 알제리 독립戰 동참

乙의 열등감 투쟁으로 전복 시도

인종ㆍ식민 굴레서 해방된 실존 꿈꿔

甲의 폭력 구조화된 한국 사회

‘헬조선’식 사고엔 극복 의지 없어

조롱 그치지 않고 모순 근원 찾아야

프란츠 파농은 한국에서 1980년대에 제3세계 민족해방투쟁의 전사로 되살아나 많은 지식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단호한 행동과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그리고 식민지 민중의 성격과 의식, 행동에 대한 분석은 끈질기게 남아있는 식민지성을 반성하고 극복하는 실천적인 모범을 보여주었다. 우리에게서 서서히 잊혀 질 무렵 그는 구미에서 탈식민주의 이론과 실천의 전범으로 다시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러한 논의를 통해 파농은 다시 수입되기 시작했다. 파농의 사상은 대표적인 탈식민주의 학자인 호미 바바나 에드워드 사이드에게 영향을 미쳐 ‘양가성’이나 ‘오리엔탈리즘’ 같은 개념의 산파 역할을 하였으며, 폭력과 투쟁의 이빨이 제거된 그의 사상은 탈식민주의 이론으로 옷을 갈아입고 학계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파농은 항상 온 몸으로 현재를 살았다. 오늘 우리가 그를 다시 읽는 이유는 과거가 아니라 현실의 오늘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오늘 이 땅에서도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은 식민주의의 잔존물들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다. 노골적인 역사 왜곡이 판을 치고 아와 타를 구분 못하는 정신분열적 행태가 최정상의 자리에서 나부낀다. 공권력의 폭력이 일상화되고 사람들의 생각과 몸이 무력하게 서로 분리되는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파농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프란츠 파농은 1925년에 프랑스의 식민지 앤틸리스 제도의 마르티니크 섬에서 태어났다. 파농은 프랑스가 나치에 점령되었던 1943년 마르티니크를 탈출하여 도미니카에 있는 프랑스 해방군에 자원입대하였다. 프랑스 남부에서 목숨을 걸고 항독 전쟁에 참여한 파농의 조국은 프랑스였다. 그러나 위대한 식민모국의 뻔뻔함과 프랑스인들의 모멸찬 시선에 치욕을 겪으면서 19세 흑인 소년은 자신이 프랑스인이 아니라 단지 식민지 마르티니크의 원주민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식민지의 삶은 제국주의의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지배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속에서 식민지 민중의 삶과 생활의 일상공간이 만들어지고, 그것은 그들의 성격과 생각을 규정한다. 제국주의는 식민지 민중의 땅을 빼앗고 그들의 말과 언어를 몰수한다. 그를 통해 식민지의 경제를 장악하고 식민지인의 행동을 지배한다. 제국은 흑인 식민지인에게 열등하다는 식민지 콤플렉스를 주입하여 백인과 식민 모국을 선망하고 모방하도록 만든다. 식민지 사람들은 백인의 생활방식과 말을 모방하면서 분열증의 덫에 걸려들면 그들은 정말 무능해진다.

알제리 독립전쟁(1954-1962)과 ‘베일을 벗는 알제리’

전쟁 후 1951년 파농은 정신의학 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이듬해에 그의 첫 저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출간한다. 28세인 1953년에 파농은 의사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알제리 블리다 조엥빌 병원의 과장으로 취임하였다. 파농은 점차 흑인이라는 조건이 인간을 억압하지만 거꾸로 그것이 어떻게 새로운 해방을 위한 기반이 되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파농에게 알제리 독립전쟁은 그를 새로 태어나게 만든 모태였다. 1954년 11월1일 알제리 저항군은 프랑스의 지배에 대항하여 봉기하였고, 프랑스는 잔혹하게 민족해방세력을 억압했다. 이후 그는 알제리 독립전쟁이란 자궁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나오면서 새로운 흑인으로 태어난다. 마르티니크 출생 파농에게 알제리는 그의 새로운 모국이자 어머니가 되었다. 프란츠 파농은 알제리의 독립을 100여일 남긴 1961년 12월 6일 36세의 젊은 나이에 백혈병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에메 세제르는 다음과 같이 그를 추모했다. “우리가 눈을 가리고 현실을 보지 않으려 할 때, 우리가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잠들려 할 때, 그러지 못하도록 우리의 귀를 열어준 사람”, 그는 ‘세속의 성령’이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않으려 할 때 그는 뜨거운 불로 다가와 눈과 귀를 열고 마음을 다스리도록 다그친다. 그는 항상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이었고 남이 만든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근거 위에 서서 생각하는 독립적인 인물이었다.

‘우리는 오래된 마르티니크의 원주민’에 불과하다는 불행한 자각에서 출발한 파농의 투쟁은 하나의 실존적 인간으로 깨어나는 비극의 정신으로 발전하였고 그것을 민족해방을 위한 행동과 연결시켰다. 그는 무엇보다 개별적 인간이 독립된 인간으로 대접받고 행동하기를 원했다. 흑인과 여성은 그들의 생각이 아니라 몸으로 범주화되고 판단된다. 그들은 백인과 남성이라는 범주 존재에 의해 구속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해방운동과 흑인해방운동은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존재적 기반을 갖고 있다. 시몬느 드 보브와르가 ‘제2의 성’에서 분석한 남성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지는 여성의 의식과 파농이 분석하는 흑인의 분열증은 그런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1958년 5월 13일, 수도 알제 광장에서 여성들이 전통 복장 히잡을 벗어던졌다. 알제리의 여인들은 알제리 전투에서 봉건적 제약이었던 베일을 벗어던지고 전투모를 쓰면서 민족해방의 전선에 동참했다. 그러다가도 필요하면 히잡을 비롯한 전통 의상을 입고 각종 무기들을 은닉하거나 운반하였다. 이제 히잡 그 자체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전통은 투쟁에 종속되는 관습에 불과한 것임이 판명되었다. 여성 전사들은 몸으로 그런 역할을 수행하면서 봉건적 지배와 식민지배라는 두 개의 굴레를 동시에 벋어 던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환경과 조건이라는 존재의 구속이 실천적 특권을 통해 극복되는 탈식민주의의 뛰어난 사례가 되었다. 비단 히잡만이 아니라 생활 주변의 모든 환경과 사물의 의미가 민족해방운동 속에서 다시 규정되었고 이전과 다른 뜻을 지니게 되었다. 그 과정은 수치스런 열등감에 휩싸였던 식민지인이 하얀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검은 얼굴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회적 각성이었으며 타자에 대해 주체를 일궈 세우는 실천이었다.

식민지의 치욕을 넘어서

우리 사회에서는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지역적 근원주의가 여전히 판을 친다. “너의 출신지로 돌아가라는 말”, “너의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지역주의나 전통주의에 불과하다. 파농은 앤틀리스에서 태어났으나 프랑스에서 공부했고 알제리에서 싸웠으며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흑인인 점을 잊은 적이 없지만 ‘네그리튀드’에 기대거나 흑인이라는 폐쇄된 공간 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다. 파농은 식민지라는 집단적 상황이 주체의 정신과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모멸과 굴종, 수치와 치욕의 체험 속에서 파악하였다. 그는 이런 식민지 열등감을 해방투쟁의 경험으로 전복하려고 하였다. 항상 현재를 산 파농의 삶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현재 우리 사회 속에 가득 찬 폭력과 모멸의 시선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구조화된 불평등과 폭력은 포기와 조롱의 왜곡된 심리를 낳는다. ‘헬조선’이란 자포자기식 사회선언에는 자신이 불행하다는 의식은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려는 해방의 의지와 비극의 정신은 없다. 그것은 식민지 지배의 기반이 되었던 인종주의적 운명주의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정서가 아니다. ‘갑’과 ‘을’이라는 제도화된 폭력의 구조 안에 살면서 서로 모멸하고 조롱하는 사이에 우리는 모두 속물과 잉여라는 범주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린다. 모멸하는 자와 조롱하는 자 사이에는 사회적 관계가 들어 설 여지가 없다. 우리 사회는 모멸과 조롱 속에 서서히 무너져 내리면서 ‘사회가 아닌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

식민주의자의 노골적인 폭력과 모욕적인 시선은 식민지인에게 치욕감을 안겨주어 그들의 자존심과 주체성을 앗아갔다. 마찬가지로 죄의식과 애도 대신에 수치심과 증오로 가득 찬 사람들이 늘어나면 이 사회는 사랑과 평화가 사라지고 폭력과 치욕만이 난무하는 사회 아닌 사회가 될 것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모순의 기원을 알아내려면 부단하게 과거를 기억 속에서 불러내어 그것을 역사 앞에 서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과거가 현재와 이어지고 기억이 역사와 연결된다. 우리는 오늘의 현실이 과거의 식민주의와 맞닿아 있는 지점과 그 근원을 찾아내야 한다. 그곳에 역사의 심판을 들이대지 못한다면 역사는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이 사라져버린 자신감과 우애와 해방투쟁을 위해 파농을 우리 곁에 현재로 살아나게 할 바로 그 때인지도 모른다.

백욱인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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