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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진 칼럼] 국정 농단

입력
2014.12.05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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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소에 똬리 틀고서 권세를 독점하는 짓

정윤회 문건 처리과정이 국정 농단 전형

대통령 통찰력과 소통으로 멀리 내쳐야

1980년대 권위주의 시절 유행하던 풍자가 떠올랐다. 국가 원수들이 단골 메뉴에 올랐다. 그 중 후르시초프에 관한 얘기다. 한 백성이 길거리에서 “후르시초프는 욕심쟁이”라고 소리를 지르다 주변의 신고로 붙잡혔다. 경찰과 검찰은 그를 ‘국가원수 모독’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했다. 나름 여론을 확인하고 사실관계를 살폈던 KGB는 나중에 공소장 내용을 변경했다. 죄목은 ‘국가기밀 누설’이었다.

과거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했던 정윤회씨와 현재 대통령 비서 3인방이 국정을 농단(壟斷)했다는 문건이 언론에 보도돼 나라가 난리다. ‘농단’의 의미가 새삼 궁금했다.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여 이익이나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뜻하며, 대개의 경우 비난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돼있다(두산백과사전). 2,400년쯤 전 중국 맹자(孟子)의 저서 공손추(公孫丑 하(下)편에 나온다고 한다. 맹자는 “욕심 많은 장사치가 홀로 높은 언덕(壟斷)을 차지하고 앉아 시장 전체의 움직임을 파악해 이익을 독차지했다”는 고사를 거론하며, “남을 밀어젖히고 부귀와 권세를 움켜쥐고 있는 것(私壟斷焉ㆍ사농단언)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장사치는 당시 없었던 상거래세금을 만들게 했고, 그 때문에 스스로 망했던 모양이다. 맹자는 자신에게 재산과 권력을 주겠다는 왕에게 이 말을 남기고 관직을 떠났다.

옛 소련 후르시초프의 풍자나 농단의 의미를 새겨보면 이보다 더 생생한 데자뷰가 있을 것 같지 않다. 박 대통령은 이번 사태가 불거지자 대뜸 문서 유출을 질타했다. 대통령의 발언은 “문건을 외부로 유출한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에 무게가 쏠려 있었다. 문건의 내용에 관해서는 “시중에 떠도는 수많은 루머들과 각종 민원”이라면서, “조금만 확인해보면 금방 사실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을, 의혹이 있는 것같이 몰아가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말했다. 검찰 수사를 독려했다.

청와대비서실에서 공식적으로 작성된 문건과 이를 보도한 언론에 대해 대통령이 누구로부터 어떤 보고와 설명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대통령이 그 내용을 찌라시 수준으로 단정하고, 문건 유출과 언론 보도에 문제의 초점을 맞춘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언론이 확인하고 보도한 사안들만 보더라도 대통령의 인식은 일반인의 합리적 판단에 크게 어긋난다. 대통령은 보고서 문건을 ‘낭설과 찌라시’로 믿고, ‘공식 문건을 유출한 사실’에 무게를 실어 비서진을 질타하고 검찰수사를 지시했다. ‘실상-보고-판단-조치’ 사이에 비상식적인 괴리가 크다는 사실을 이번에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대통령 주변에 국정 농단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생하고 현실적인 증거다.

대통령의 말대로 이번 사건은 “조금만 확인해보면 금방 사실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문건이 공개돼 있고, 도처에서 그 내용이 검증되고 있고, 관련 당사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추이를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이해와 상반된 사실이나 언급이 나오면 언제라도 ‘가능한 법적 조치’를 취하거나 ‘폭로와 언급’을 주저하지 않을 인물들이다. 사실여부는 머지않아 드러날 것이고, 문책도 있고 처벌도 수반될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이 사태의 심각성을 이번에도 여전히 모르고 지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국정을 농단하는 세력이 여전하다면 말이다.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씨나 대통령의 옛 심복 정윤회씨가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이권에 개입하고 인사에 영향을 미친다면 세울 대책이라도 있을 게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청와대 상황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여 국가의 정보를 독차지하고 권세를 움켜쥐고 있는 세력’이 있다면 대책 자체를 세울 방법이 없다.

국정 농단 여부를 경찰과 검찰이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국정 농단 금지법’이란 게 있지도 않다. 정치적 판단의 문제이며, 박근혜 대통령의 몫이다. 국정에 대한 ‘실상-보고-판단-조치’ 시스템에서, 특히 ‘보고-판단’ 과정에 국정 농단 세력이 청와대에 똬리를 틀고 있다면 백약인들 효과가 없다. ‘실상’과 ‘조치’ 사이의 괴리를 최소화하는 것은 대통령의 통찰력과 소통의지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국정 농단 세력을 끊임없이 찾아내어 멀리 내치는 일이다.

주필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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