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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김중혁의 영화당] "남자가...어깨 펴" '부당거래'의 시작점이 궁금하다

입력
2017.08.1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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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군함도'.
영화 '군함도'.

어떤 예술 작품을 보고 나면, 첫 번째 아이디어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영화 ‘올드 보이’의 첫 번째 이미지는 갇힌 방에서 수년 동안 만두를 먹는 장면이었을까, (스포일러가 있어 자세한 묘사는 할 수 없지만) 혀에다 가위를 대는 장면이었을까. 비틀스가 ’에잇 데이스 어 윅(eight days a week)’을 만들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서서히 고조하는 기타 리프였을까, 아니면 ‘오오 아이 니드 유어 베이브(OOh I need your babe)’라고 노래할 때의 멜로디였을까. 창작자에게 둘 중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 물어봐도 좋겠지만, 둘 중 어느 쪽이 먼저였을지 상상하는 것은 수용자의 특권이기도 하다. 모든 위대한 작품 역시 하나의 점에서 시작한다. 그 점을 떠올리면서 자신만의 해석을 덧붙이게 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위대함일 것이다.

엑스선으로 위대한 미술 작품을 분석하는 것은 흥미롭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창작자의 시작점을 유추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창작자가 감추고 싶었던 비밀을 들추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에두아르 마네의 명작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을 엑스선으로 검사했을 때 사람들은 몇 가지 사실 때문에 놀랐다. 엑스선 검사를 하면 화가가 어떤 방식으로 그림을 고쳤는지 자세히 알 수 있게 되는데, 마네는 제대로 된 스케치에서 시작해 소실점이 제멋대로인 그림으로 완성했다. 그림이 발표되었을 때 ‘마네는 원근법도 모르는 화가’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엑스선 검사를 해보니 원근법 무시는 마네의 의도였다. 제대로 스케치한 다음 일부러 다르게 그린 것이다. 스케치와 달라진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스케치에서 아래쪽의 술병을 바라보던 여자 종업원은 완성된 그림에서 정면을 바라본다. 마네는 왜 여자 종업원의 시선을 바꾸었을까. 마네에게 물어보지 못했지만, 내 생각엔 그렇다. 그림을 보는 당신을, 마네는 여자 종업원을 통해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떤 예술 작품은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나아가고, 어떤 예술 작품은 완성된 작품을 의도적으로 붕괴시킨다. 어떤 예술가는 ‘작품이 그럴 듯해 보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지만 또 다른 예술가는 ‘그럴 법 하지 않은 현실’을 그리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 언젠가 인공지능이 인간의 모든 예술적 활동을 대체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일부러 망치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 아닐까 싶다. 매끈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너무 잘 짜인 듯한 이야기를 보면 어딘가 흠집을 내고 싶어하는 본성이,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감각이 인간의 상상력을 확대시켜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최근에 본 류승완 감독의 영화 ‘군함도’에 엑스선을 대보고 싶었다. 영화의 시작점이 어딘지 궁금했다. 감독은 영화의 제작 과정을 소상하게 밝혔지만 여전히 나는 ‘군함도’가 시작된 첫 번째 이미지가 궁금하다. 혼자 상상해보게 된다. 아마도 어두컴컴한 지하, 숨쉬기 힘들고 습기로 가득한 지하, 바닷속 지하, 아득해서 가늠하기 힘든 깊이의 지하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내려가는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감독은 거기에서 어떤 장면을 고쳤을까. 어떤 장면을 추가하고, 어떤 이야기를 빼야 했을까. ‘군함도’를 보면서 류 감독의 첫 번째 영화였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생각했다. 17년 전의 영화다. ‘초심을 잃었다’거나 ‘옛날이 좋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한 명의 예술가가 17년 동안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문득 생각하게 된다.

영화 '짝패'.
영화 '짝패'.
영화 '부당거래'.
영화 '부당거래'.

류승완 감독의 오랜 팬으로서 ‘짝패’와 ‘부당거래’는 서로의 거울 같은 작품이란 생각을 자주 했다. ‘짝패’가 ‘일부러 작품을 망치려는’ 장난기로 가득한 영화라면, ‘부당거래’는 그런 장난기를 묵묵히 바라봐주는 ‘형님’ 같은 영화다. ‘짝패’가 뜨거운 영화라면, ‘부당거래’는 차가운 영화다. ‘짝패’가 브리콜라주(되는대로 아무거나 이용하는 예술기법) 같은 작품이라면, ‘부당거래’는 수없이 많은 군살들을 깎아낸 조각 같은 작품이다. 숨 한번 크게 들이쉰 다음 한 호흡으로 달리는 영화가 ‘짝패’라면, 일정한 호흡으로 쉬지 않고 달려가는 영화가 ‘부당거래’다. 수정이 불가능한 수채화 같은 작품이 ‘짝패’라면, 붓질을 여러 번 하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유화 같은 작품이 ‘부당거래’다. 이상하게 ‘짝패’의 시작점은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부당거래’의 시작점은 궁금하다. ‘짝패’는 주인공이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아이 씨발”이라는 욕을 하며 끝나고, ‘부당거래’는 부당한 거래를 한 검사에게 장인이 하는 충고로 끝난다. “남자가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거지 왜 이래, 곧 아빠 될 사람이. 어깨 쭉 펴, 이 사람아.” 류 감독의 걸작 두 편을 꼽으라면 망설이지 않고 ‘짝패’와 ‘부당거래’를 꼽을 텐데, 그 이유는 완전히 반대다.

이미 완성된 듯한 감독의 신작을 기다리는 일도 흥미롭지만, 다음에 어떤 작품을 만들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감독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류 감독과 동시대에 살면서 그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내게는 큰 기쁨 중 하나다. 그는 지속적으로 변하고 있고, 계속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 가끔은 마음에 들지 않는 장소로 나를 이끌어갈 때도 있지만, 나는 늘 기꺼운 마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가보겠다.

김중혁 소설가〮B tv ‘영화당’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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