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등록 : 2017.04.08 04:40
수정 : 2017.07.01 16:04

[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전도된 현실과 허구… 이 세상은 매트릭스다

등록 : 2017.04.08 04:40
수정 : 2017.07.01 16:04

<5>가상현실의 원류, 필립 K 딕

#1

장자, 데카르트, SF가 던진 질문

우리가 사는 현실은 실재하는가

뇌과학 철학 우주론에 걸친 문제

결론은 “가상현실일 수밖에 없다”

#2

정신질환 겪으며 자아의 실재 천착

‘토탈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

할리우드 영화화한 작품만 10여편

핸슨社 인간다운 로봇 제작에 영감

1999년 개봉 당시 전 세계 관객을 흥분시킨 영화 '매트릭스'. '뉴로맨서' '공각기동대' 등의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가 사실은 가상현실이라는 이 아이디어의 원류는 SF 작가 필립 K. 딕이다. 워너브라더스 제공

1999년, 영화 ‘매트릭스’가 개봉되었을 때 세계는 흥분에 휩싸였다. 지금은 고유명사가 되다시피 한 이름이지만 당시만 해도 관객들은 극장에서 나오면서부터 논쟁과 토론으로 소란스러웠다.

“그래, 우리가 굉장한 걸 본 건 맞아. 그런데 대체 우리가 뭘 본 거지?” 이 질문은 지금은 자매가 된 위쇼스키 형제 감독이 투자자들에게 수년 간 퇴짜를 맞으며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와, 이건 굉장한 것이 되겠군요.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소리죠?”

시끌시끌한 가운데에 SF 팬들은 영화 속에서 여러 익숙한 코드를 발견하고 즐거워했다. 매트릭스라는 단어 자체부터 윌리엄 깁슨의 SF ‘뉴로맨서’의 세계관을 가져왔고, 최근 영화화하기도 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풍경과 연출이 고스란히 있었다. 지금 언급한 모든 작품의 원류에 필립 K. 딕이 있다. 물론 여기서 더 올라가면 장자의 호접지몽, 데카르트의 회의론에 플라톤의 이데아론까지 언급해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가상현실을 살고 있을까

“우리가 지금 가상세계를 살고 있는 건 아닌가?” 데카르트는 ‘만약 악령이 내 지각 전체를 속이고 있다면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고 질문한다. 이 생각을 이어받아 1975년 철학자 피터 웅거는 ‘우리는 통 속에 담긴 뇌고, 과학자가 전기 자극을 주고 있다’는 유명한 가설을 제시한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이런 과학자가 없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으므로’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가상현실을 살고 있다.” 2003년, 철학자 닉 보스트롬은 한발 더 나아가 이런 주장을 편다. 이 생각은 마블 캐릭터 ‘아이언 맨’의 살아있는 모델로도 불리는, 전기자동차 회사 테슬라, 민간우주기업 스페이스X의 CEO인 일런 머스크에 의해 더 널리 알려진다. 머스크는 미래 인류가 현실에서 살 가능성은 10억분의 1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가상현실의 발전 속도가 지금의 1,000분의 1로 준다고 해도, 결국 인류가 현실과 구분이 가지 않는 세상을 만들 것은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아직 한 번도 가상현실을 만들지 못한’ 첫 번째 우주에서 살고 있을 가능성 역시 그리 없다고 본다. 어쩌면 두 번째나 세 번째 우주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는 더해서 지금 세상이 가상현실인 편이 더 좋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건 인류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발전해있다는 뜻이며, 이 세계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물론 아직까지는 하나의 사고실험이다.

내가 지각하는 세상은 현실인가

정신과학, 인지과학 지식이 있기 전부터 철학자 등이 다양한 근거에서 자아와 세계의 현실성을 의심해 왔듯이, 딕은 그의 불행한 인생사와 정신병력 때문에 이 문제에 천착했다. 딕은 출생 6주 만에 쌍둥이 누이가 수유 부실에 의한 영양실조로 사망한 뒤 이를 일생 트라우마로 안고 산다. 어릴 때는 부모의 불화와 이혼으로 친척집과 탁아소를 전전했고, 10대에 기숙학교에 들어갔지만 광장공포와 공황장애로 퇴교하고 대학도 중퇴한다. 베트남전 반대운동 중 미 연방수사국(FBI)의 방문을 받은 후로는 정부의 감시를 받는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다섯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고 편집증, 공황장애, 약물 중독에 시달렸으며 말년에는 자살충동으로 정신병동을 오가기도 한다.

일생을 이상과 정상의 불안한 경계에 서 있었던 이 작가는, SF 창작을 통해 자신의 정신적 고통과 혼란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휴고상 수상작이기도 한 그의 장편 ‘높은 성의 사내’를 보자. 이 소설은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아니라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이 승리한 세계다. 일본과 독일의 전체주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주인공은 거꾸로 연합군이 이긴 세계에 대한 대체역사소설을 쓰는 사내를 만난다. 주인공은 마치 지금 현실이 가짜고 그 소설이 진짜인 것만 같은 혼돈에 빠진다. 이 작품의 재미있는 점은, 읽는 독자 역시 그 순간 똑같은 혼돈에 빠진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제법 오래 전부터 알려진 단편 ‘사기꾼 로봇(임포스터)’에서, 주인공 스펜서는 어느 날 갑자기 주위 사람들로부터 ‘진짜 스펜서는 죽었고 너는 그를 모방한 복제로봇’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스펜서는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 밝혀지는 진실은, 정말로 자신이 로봇이라는 것이다.

‘유빅’의 세상은 냉동 보존된 사람들의 의식을 주기적으로 살려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다. 여기서 초능력 대결 후 생존한 이들은 세계 전체가 몰락하고 퇴화하는 것을 체험한다. 물론 밝혀지는 진실은, 이들은 이미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원작으로 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는 자신이 인간인 줄 아는 인조인간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데카드는 이들을 인간과 구별해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하지만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인조인간을 보며 관객은 의문에 빠진다. 정말로 인조인간과 인간의 차이가 뭐란 말인가?

필립 K 딕만큼 할리우드가 사랑한 SF 작가는 드물다. 그의 동명 단편을 원작으로 한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필립 K 딕의 단편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 '토탈 리콜'.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으로 1990년 영화화된 데 이어 2012년 리메이크됐다. 우진필름 제공

미래를 본 남자의 운명을 그린 벤 애플렉 주연 영화 '페이첵'. 필립 K 딕의 동명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사회 복잡해지며 최근 공감 커져

이쯤에서 짐작하겠지만, 딕은 지금은 소장르화한 이런 계열 작품의 원류다. 단지 그가 말년에야 겨우 이름이 알려졌고 사후에나 유명해진 것에서 보듯이, 이런 생각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다.

“내가 지각하는 세상과 실제 현실이 다를 수 있다.” 망상 섞인 헛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은 실상 무궁무진하다. 예를 들어 색맹이나 시청각장애, 기타 여러 문제로 다른 감각, 인지를 가진 사람은 보통 사람과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사람은 자외선과 적외선을 볼 수 없고 후각은 개의 100분의 1에서 1억분의 1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감각능력과 기관을 가진 동물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고 있을 것이다.

사회적인 면에서, 정부 주도의 사건 은폐와 언론 조작, 거짓 뉴스는 늘 세상의 정보를 오염시키고, 기성세대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사회구조나 제도는 신세대의 눈에는 영 엉터리로만 보인다. 사회의 지식 업데이트 속도가 빨라지면서 어제는 옳았던 이론이 오늘은 틀린 경우도 허다하다.

딕은 현대사회가 그의 소설만큼이나 복잡하고 비정형적이 되면서 널리 공감을 받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세상은 원래 다원적이고 비정형적이었지만, 과거에는 좀 더 많은 것이 통제되고 감춰져 있어 억지로 단순해 보였고, 지금은 사람들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인간보다 인간다운 안드로이드라는 묘사는 '블레이드 러너'를 명작의 반열로 끌어올렸다. 이 영화의 원작인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는 지금 인간의 마음을 가진 로봇을 제작하고 있는 핸슨 로보틱스사의 영감의 원천이었다. 워너브라더스 제공

영화, 로봇 제작에 영감이 된 작가

할리우드에서 딕만큼 인기 있는 SF 작가도 찾기 어렵다. 지금도 명작으로 회자되는 리들리 스콧 감독, 해리슨 포드 주연의 ‘블레이드 러너’에서부터, 폴 버호벤 감독,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토탈리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톰 크루즈 주연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그 외에도 ‘넥스트’ ‘페이첵’ ‘임포스터’ ‘스캐너 다클리’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다.

그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창작자와 작품은 일일이 다 언급하기도 어렵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메멘토’와 ‘인셉션’이 딕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고백한 바 있고 ‘루퍼’의 라이언 존슨 감독도 딕을 언급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종종 ‘일본의 필립 K. 딕’으로 불린다. 그 외의 무수한 사이버펑크와 펄프 픽션이 그의 영향 아래에 있다. 그래서 딕은 ‘작가를 위한 작가’라고도 불린다.

딕은 어떻게 이처럼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까. 그는 현실이 허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넘어서, 허구의 세계가 현실일 수도 있다는 아이디어를 주는 사람이다. ‘허구가 현실을 넘어서는 진실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세계관, 허구의 세계를 창조하며 살아가는 창작자들이 매료될 만하지 않은가.

핸슨 로보틱스사가 제작한 필립 K. 딕 로봇. 인간의 마음을 가진 로봇을 만들겠다는 창업자 데이비드 핸슨의 아이디어는 어릴 적 그의 작품을 읽고 품은 꿈이었다. 핸슨 로보틱스사 제공

딕의 영향은 비단 대중문화에만 이르지 않는다. 선도적인 휴먼 안드로이드 제작사 핸슨 로보틱스사를 이끄는 데이비드 핸슨은 ‘마음이 있는 로봇’의 제작에 열중하고 있다. 그의 로봇은 인간의 감정을 지각하고 반응하며 대화를 한다. 그는 안드로이드 중 하나를 딕의 모습을 본따 만들었다. 이 로봇은 딕의 글, 편지, 인터뷰를 모아 자연어 처리한 데이터를 통해 대화를 한다. 어린 날의 핸슨에게,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등의 작품을 통해 “기계도 인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 준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다.

김보영ㆍSF 작가

필립 K. 딕

1928년 12월 16일~1982년 3월 2일. 미국의 과학소설가. 평생 광장공포와 편집증, 공황장애, 암페타민 중독 등에 시달렸다. 44편의 장편과 100편이 넘는 단편을 발표했으나 일생 생활고에 시달렸다. 생애 말기와 사후에 재평가되어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에 비견되는 SF의 거장으로 손꼽힌다. 1983년, 생전에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삶을 기려, 페이퍼백으로 처음 출간된 오리지널 작품에 수여하는 필립 K. 딕 상이 제정되었다. 이 상은 지금은 세계 3대 SF문학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소개된 책>

높은 성의 사내

필립 K. 딕 지음

남명성 옮김

폴라북스 발행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필립 K. 딕 지음

박중서 옮김

폴라북스 발행

유빅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폴라북스 발행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필립 K. 딕 지음

조호근 옮김

폴라북스 발행

<필립 K. 딕 로봇>

https://www.youtube.com/watch?v=sJ930zzYxl8

필립 K. 딕 안드로이드 소개영상

https://www.ted.com/talks/david_hanson_robots_that_relate_to_you?language=ko

필립 K. 딕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는 데이비드 핸슨의 TED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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