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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동강난 트로피

입력
2017.02.15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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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피(trophy)는 승리의 상징물이다. 그런데 어원인 그리스어 ‘trope’는 ‘참패(慘敗)’라는 뜻이라고 한다. 지금은 반대 뜻으로 쓰는 것 같지만 적군과 싸워 크게 물리친 자리에 승리를 기념해 노획한 물건들을 막대기에 걸어 두었던 승전기념비라는 걸 생각하면 뜻이 통한다. 트로피는 승리를 안겨 준 신에게 감사해 전리품을 바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그래서 트로피를 부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자 천벌 받을 행위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 엊그제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상(‘25’) 등 5개 부문을 휩쓴 영국 가수 아델이 들고 있던 축음기 모양의 그래미 트로피를 두 동강 냈다. 아델은 직전 수상 소감 연설에서 “나는 이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대단히 감사하지만 너무 송구합니다. 비욘세의 앨범 ‘레모네이드’는 위대하고 잘 구상된 훌륭한 작품입니다”며 비욘세가 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트로피를 쪼갠 것은 비욘세와 나누겠다는 의미인 듯도 하다. 이번 그래미상에서 올해의 앨범을 포함해 9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레모네이드’는 수록곡 ‘포메이션’ 등에서 미국인 흑인 여성들이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힘을 담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여러 음악 장르를 섭렵하며 여성 인권, 성소수자 문제까지 다룬 사회성 짙은 앨범이었지만 베스트 어번 컨템포러리 앨범상 하나로 만족해야 했다.

▦ 미국 대중문화계의 인종 차별 논란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래미상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에는 기념비적인 힙합으로 평가받으며 올해의 앨범 유력 후보였던 켄드릭 라마의 ‘투 핌프 어 버터플라이’가 수상을 놓쳤다. 이 앨범에는 미국 경찰의 흑인 사살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운동가로 부른 ‘올라잇’이 수록돼 있었다. 2013년에 기대와 달리 올해의 앨범상을 받지 못한 프랭크 오션은 인종 차별을 이유로 올해 시상식을 보이콧 했다.

▦ 스티비 원더가 이 상을 세 번이나 받았다고 하니 단칼에 그래미의 흑인 편견을 말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곧 환갑을 맞는 이 상을 받은 흑인 여성이 나탈리 콜, 로린 힐, 휘트니 휴스턴 세 명뿐이라는 걸 생각하면 흑인 여성에게 문이 닫혔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아델은 수상 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그녀가 올해의 앨범상을 타려면 도대체 무엇을 더 해야 하나요.”

김범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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