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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엘리트의 소양을 묻지 않는 나라

입력
2017.01.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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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인공지능 ‘알파고’와 ‘4차 산업혁명’이 언론에 오르내리던 작년, 국회나 행정기관의 여러 교육 혁신 관련 토론회에 참석했다.

지식을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새로운 산업혁명이 물밑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의 교육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는 폭넓은 공감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 해법을 놓고는 서로 생각이 엇갈리고, 논의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가로막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교육관계자들이 제안하듯 학교에서 토론과 프로젝트 수업을 장려하고, 컴퓨터 코딩 교육을 하는 것이 학생들이 새로운 지식산업 사회에 적응하도록 하는 데 일정부분 도움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노력만으론 우리가 겪는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개인과 사회 환경을 조성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본다. 초, 중, 고 과정에서 좋은 의도로 도입한 교육 프로그램들이 일정한 효용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입시 ‘게임’의 기제로 변질되고 축소되는 경우를 숱하게 봤기 때문이다.

조직 생활을 하다 보면 단순한 인지 능력이나 근성보다는 사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와 커뮤니케이션, 사고의 폭, 언행일치의 실행력이 더 중요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이런 소양은 자신이 살아가면서 경험과 배움을 통해 진정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에 따라 형성된다. 마땅히 학창시절 개인의 삶과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유용한 경험과 배움을 함양할 수 있어야 하는데, 풍부한 교육 콘텐츠의 가능성에 비해 우리 학생들이 현행 입시 체제 하에서 얻는 경험과 배움은 지극히 협소하고 편협하다. 그러니 확장하는 네트워크 사회의 복잡성에 대응할 마음의 힘과 생각의 유연성을 키우지 못한다.

한번은 이런 문제제기를 했더니, “그래도 학교에 입시와 경쟁은 필요하고, 학창시절 그렇게 분투하고 노력하는 경험 자체가 본인의 능력 신장에 도움이 되는 것 아니냐. 어느 사회나 메리토크라시(능력주의)는 필요한 법이다”는 반론을 들었다. 나름 성공한 사람들로 가득한 토론 멤버 중에서도, 세계적 명망과 연륜이 있는 지식경제 분야 전문가였다. 작은 컨설팅 회사의 젊은 사장인 나에 비해 훨씬 많은 경험과 혜안을 가진 그분의 뜻을 내가 다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주변에 많은 성공한 원로들이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비슷한 신념의 패턴을 관찰하면서, 나는 저 원로들 본인의 과거 경험과 성공방정식에 기반한 확신이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에 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이 저개발 국가였던 당시에는, 지식의 깊이와 다양성이 시급하지 않았다. 학벌은 저개발 국가의 거버넌스와 생산성의 목표를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지표로서 대강의 정확성을 가졌다. 경험적으로 봤을 때 나라 안팎에서 가장 높은 학벌을 ‘쟁취’하는 한국사람들은 대체로 평균 이상의 인지능력과, 가장 높은 수준의 ‘독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높은 수준의 현명함이나, 윤리적 태도나,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보여주는 경우는 놀랄 정도로 드물었다. 나는 사회적으로 길러져 온 한국 엘리트의 이런 전형적 모습이, 사회에 만연한 리더십 결여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난 한국 사회에 엘리트와 메리토크라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때보다도 더 간절하게. 단, 제대로 된 엘리트 상이 새로이 확립돼야 진정한 메리토크라시가 작동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에 대한 보다 장기적이고 폭넓은 시각을 가지고, 그가 사회를 이끌어 가기 위해 어떤 마음과 역량을 갖춘 인재인지를 보다 엄밀히 물었으면 싶다. 그간 우린 엘리트의 소양을 묻는 법을 몰랐던 것 같다.

외국 유학 시절, 한 중국 유학생과 기숙사에서 같이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평소에 머리도 잘 감지 않고 영어도 능숙하지 못한 꾀죄죄한 몰골의 그를 경시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막상 대화를 시작하니, 그의 관심사는 중국과 세계의 역사에서부터 인류의 발전 방향까지 종횡무진으로 펼쳐졌다. 저런 고민을 하며 공부하다 본국으로 돌아가 국가와 사회에 봉사할 수많은 ‘엘리트’를 가진 중국이 부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반면 한국 유학생들은 대체로 자기를 어떻게 포장해서 한국으로 돌아가 대접받는 위치를 점할 지에 관심이 집중된 듯했다. 그리고 오늘날도 콘텐츠가 없는 ‘게임 보이’들을 너무 많이 목도한다. 누구를 탓하겠나. 우리가 그렇게 키운 것을.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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