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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맥주의 도시' 강릉을 맛보다

입력
2017.06.0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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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조장 버드나무 브루어리

강릉의 솔잎, 쌀 원료로 쓰고

옛 지명, 창포를 맥주 이름에

현재 전국 50곳으로 납품

#2

터줏대감 ‘테라로사 커피’

커피 박물관-도서관-공연장 등

강릉을 예향으로 만드는 게 꿈

서울-부산 등 직영 매장도 11곳

강원 강릉을 ‘커피 도시’로 만든 커피 공장이자 카페인 ‘테라로사 커피’. 새로 지은 공장에 있는 사진 속 카페는 주말에만 영업한다.
강원 강릉을 ‘커피 도시’로 만든 커피 공장이자 카페인 ‘테라로사 커피’. 새로 지은 공장에 있는 사진 속 카페는 주말에만 영업한다.

내년 2월 열리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영동고속도로는 구간별로 공사 정체가 이어졌다. 터널을 지나고 고개를 돌아 태백산맥을 통과하자 강릉이 펼쳐졌다. 춘천과도, 원주와도 다른 강원도의 산맥 동쪽 도시. 강릉을 통해야 속초, 양양, 주문진, 그리고 동해와 삼척에 닿을 수 있다. 서울의 피로를 벗고 느린 삶으로 갈아타는 이들을 불러모으는 ‘두 번째 제주도’ 지역이다. 누구에게는 오래된 도시, 바다 보고 두부 한 모와 회 한 접시 먹는 심심한 관광지였을지 몰라도 최근 영동 지역에선 생업을 찾는 이주자들이 새로운 풍경을 속속 만들고 있다. 이주 열풍 초기의 제주도처럼 새로운 먹거리와 놀거리가 빼곡하게 차오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물 맛’은 대번에 손 꼽을 만하다. 강릉 물맛에 대한 오래된 속설은 두부에 관한 것인데 바로 ‘초당 두부’ 이야기다.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 선생이 강릉 물 맛을 보고 영감을 얻어 바닷물로 두부를 뜬 데서 시작됐다. 짜디짠 바닷물에 특출한 물 맛이라는 것이 있었을까 싶긴 하지만 ‘초당’이라는 이름부터가 허엽 선생의 호다.

요즘 강릉 물 맛은 그러나 새롭다. 전남 보성 하면 녹차가 떠오르듯이 강릉 하면 이제 커피다. 강릉 커피축제는 강릉의 중요한 행사인 단오제 못지 않다. 강릉엔 ‘초당 두부마을’이나 ‘사천 물회마을’ ‘병산 옹심이마을’도 있지만 ‘강릉 커피거리’도 있다. 해안선을 따라, 또 구도심의 거미줄 같은 길을 따라 각양각색 개성의 커피 전문점들이 맛을 뽐낸다. 1988년부터 커피에 생을 투자한 커피 명인 박이추씨는 서울 안암동의 커피 노포인 ‘보헤미안’을 강릉에 새로 차렸다. 안암동 가게는 수제자에게 물려줬다. 강릉에서 시작해 서울은 물론 전국구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테라로사 커피’와 함께 ‘커피 도시 강릉’을 이루는 양대 산맥이다.

강원 강릉 '버드나무 브루어리'의 크래프트 맥주.
강원 강릉 '버드나무 브루어리'의 크래프트 맥주.

크래프트 맥주 문화는 서울과 근교에 편중돼 발달했다. 2015년 9월 개업한 소규모 양조장 ‘버드나무 브루어리’는 처음부터 강릉에서 시작한 지역 맥주다. ‘경월 소주’ 같은 강릉 지역 술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단단한 각오로 서울에까지 명성이 뻗치는 맥주를 생산하고 있다. 강릉에서 난 쌀을 이용한 맥주와 단오제가 열리는 강릉의 색을 담은 창포 맥주, 솔향 물씬한 해안선의 풍경을 향으로 담은 솔잎 맥주 등 강릉이 아니면 안 되는 맥주를 생산한다.

강릉의 새로운 물 맛을 헤아려 보려고 ‘버드나무 브루어리’ 전은경 대표와 테라로사 커피 김용덕 대표를 만났다. 두 사람의 이야기엔 물 맛을 넘어선 두 가지 방식의 강릉 사랑이 진하게 담겨 있다.

강릉 맥주로 살어리랏다, ‘버드나무 브루어리’

강원 강릉시내 한적한 동네에 자리 잡은 ‘버드나무 브루어리’. 매장 한가운데 작고 아늑한 중정이 있다.
강원 강릉시내 한적한 동네에 자리 잡은 ‘버드나무 브루어리’. 매장 한가운데 작고 아늑한 중정이 있다.

전 대표는 이방인이다. 강릉에 아무 연고도 없다. 투자자도, 일하는 직원들도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이방인이다. 원래 목표는 맛있는 맥주를 생산하는 소규모 양조장을 만드는 것이었을 뿐, 강릉에서 맥주를 만들겠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폐업한 양조장 자리를 수소문 중이긴 했다. 강릉에 눈을 댄 것은 우연히 강릉의 막걸리 양조장 자리를 소개 받은 것이 계기였다. 강릉 사천면의 ‘방풍도가 막걸리’ 이기종 대표가 소개한 ‘강릉 탁주’ 양조장은 폐허에 가까운 상태였다. 1920년대 강릉합동양조장의 맥을 잇는 개인 양조장이었는데, 1970년대부터 운영하다 폐업했다. 집기도 그대로 둔 채 쓸쓸히 사라졌다. 끊어진 역사를 이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덜컥 강릉에 내려갔다.

‘버드나무 브루어리’에서는 맥주를 마시며 통유리 너머로 맥주 만드는 과정을 구경할 수 있다.
‘버드나무 브루어리’에서는 맥주를 마시며 통유리 너머로 맥주 만드는 과정을 구경할 수 있다.

‘청정지역’ ‘휴가지’라는 막연한 이미지가 다였지만, 알면 알수록 강릉은 매력적인 터전이었다. “강릉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에 대한 욕구와 수용도가 높다. 좋은 음식을 먹고 새로운 것을 경험해 보는 것에 큰 가치를 둔다. 주말에는 맥주 마니아나 관광객이 찾으리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주중은 미지수였다. 막상 매장을 열고 보니 평일에는 강릉 토박이들이 찾아와 자리를 채워 준다. 덕분에 6개월 만에 자리를 잡았다.” 전 대표의 설명이다. ‘버드나무 브루어리’의 크래프트 맥주는 전국 50여 곳으로 납품된다.

지역에 단단히 밀착한 특색 있는 양조장으로 성장하겠다는 사명감 또한 강릉이 심어줬다. “양조장이 있는 곳의 지역색을 살리고 한국적인 맛과 향을 살린 맥주를 만들겠다는 목표 의식이 있었다. 강릉에 와서 더 강해졌다. 지역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강한 강릉 사람들은 ‘처음처럼’ 소주만 마신다.” 강릉 지역 소주였던 ‘경월 소주’는 두산그룹에 인수되고 다시 롯데주류로 흡수됐다. 롯데주류가 생산하는 ‘처음처럼’을 ‘경월 소주’로 대접해 준다는 얘기다.

오른쪽의 용기는 막걸리 양조에 사용하던 것이다. 강릉 탁주 시절의 흔적을 남겼다.
오른쪽의 용기는 막걸리 양조에 사용하던 것이다. 강릉 탁주 시절의 흔적을 남겼다.

‘강릉 초짜’인 ‘버드나무 브루어리’가 ‘강릉 맛’에 더욱 집중하는 이유다. 전 대표는 “맛있는 맥주를 만드는 것이 1차적인 목표이고, 그 다음은 강릉의 특색을 살리는 것”이라며 맥주를 소개했다. ‘미노리 세션’은 강릉 사천면 미노리에서 생산한 쌀을 원료로 쓴다. ‘하슬라 IPA’는 ‘큰 바다’라는 뜻의 강릉 옛 지명을 땄다. ‘파인시티 페일에일’은 강릉의 솔잎을 재료로 상쾌한 향을 가미했고 ‘창포 에일’은 석창포를 가미해 화한 느낌을 더했다.

‘버드나무 브루어리’ 전은경 대표. 사진 버드나무 브루어리 제공
‘버드나무 브루어리’ 전은경 대표. 사진 버드나무 브루어리 제공

강릉의 메디치 가문, ‘테라로사 커피’

‘버드나무 브루어리’가 ‘강릉에 녹아 강릉 맥주를 만드는 이방인’이라면, ‘테라로사 커피’는 ‘강릉에 돌아와 강릉에 공헌하는 강릉 토박이’다.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 쭉 강릉에서 자란 김용덕 대표는 강릉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해 타지로 떠났다. 은퇴하면 오두막 하나 지어 살겠다는 계획으로 장만해 둔 강릉 구정면의 1,720㎡(520평) 땅이 현재의 ‘테라로사 커피’ 공장 자리다. 강릉 개발이 꽤나 진행된 지금 보기에도 투자 가치라곤 별반 없어 보이는 입지다.

김 대표는 1998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은행을 그만두고 몇 해 동안 세계 곳곳을 여행하다 구정면 땅에 레스토랑을 차렸다. 처음부터 커피는 아니었다. 나들이 삼아 들를 만한 교외 식당에 불과했다.

강원 강릉 ‘테라로사 커피’의 원두 공장. 12개국에서 수입한 원두 70여종을 로스팅한다.
강원 강릉 ‘테라로사 커피’의 원두 공장. 12개국에서 수입한 원두 70여종을 로스팅한다.

‘테라로사 커피’가 시작된 것은 2002년이었다. 커피에 빠진 김 대표는 세계 곳곳의 이름난 로스터리며 산지를 돌았다. 커피를 배우고 질 좋은 커피를 전문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면서 커피 마니아의 성지가 됐다. 한국에서 ‘커핑(커피의 맛을 감별하는 전문적인 방법)’이라는 말이 일반화하기도 전에 김 대표는 커핑 세미나를 열었다. 싱글 오리진과 스페셜티 커피에도 선구자격이다. 카페가 아니라 커피를 로스팅해 특급 호텔과 서울 청담동 레스토랑 등에 납품하던 공장이 ‘테라로사 커피’의 시작이었다. 그래도 커피 맛을 보려고 찾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입지가 워낙 외져서 모두가 서너 번씩 길을 물어가며 찾아왔다. 여기까지가 ‘테라로사 커피’의 ‘개국 신화’다. 현재 ‘테라로사 커피’는 12개국에서 70여 종의 커피를 수입하는 ‘커피 종가’로 꼽힌다. 강릉권뿐 아니라 서울, 부산, 제주 등까지 세를 넓혀 직영 매장이 11곳이나 된다.

갓 볶은 원두의 로스팅 상태를 점검하는 ‘테라로사 커피’ 김용덕 대표.
갓 볶은 원두의 로스팅 상태를 점검하는 ‘테라로사 커피’ 김용덕 대표.

김 대표는 “재산은 모두 강릉 문화사업에 투자하겠다”고 일찌감치 자녀들에게 공표했다. “애향심이다. 건축물로써 도시 풍경을 바꾸고 그 안에 문화를 가득 채우고자 한다. 강릉은 ‘예향의 도시’라 불렸다. 강릉에 문화의 불을 지피고 싶다.” ‘테라로사 커피’ 공장은 3년째 붉은 벽돌 건물을 올리고 있다. 올여름 드디어 공사를 마치고 개장할 이 웅장한 건물의 용도는 다양하다. 로스팅 공장과 카페부터 레스토랑, 커피 박물관, 디자인ㆍ인문학ㆍ패션 서적으로 채운 도서관, 중정 형태의 야외 소공연장까지. 수익을 위한 업장보다는 사회 환원을 위한 공간에 더 가깝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이탈리아 문화를 융성시킨 것처럼, 김 대표는 강릉의 로렌초 데 메디치가 되려 한다. 강릉과 커피에 대한 애착이 달려온 끝에 도착한 종착지다.

‘테라로사 커피’ 공장의 유리 온실에선 커피 나무를 볼 수 있다.
‘테라로사 커피’ 공장의 유리 온실에선 커피 나무를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강릉 물 맛’에 대한 두 대표의 설명. 맥주나 커피나 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음료다. “그래서 강릉 물 맛이 좋아 맛이 좋은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답은 이성적으로 “아니오”다. ‘테라로사 커피’는 강릉에서 커피를 볶지만 서울에서나 부산에서나 제주도에서나 커피 맛이 같다. 원두와 로스팅이 더 중요하다. 맥주라면 더 상관 없다. “물의 차이가 전혀 없다고는 못 하지만 맥주를 만들 때는 물을 적합한 산도로 조정한다. 어떤 물을 사용해도 과학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기자의 질문에 대한 전은경 대표의 현답이다.

강릉=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사진 강태훈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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