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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상처 받을 수 있는 능력

입력
2018.04.08 13:2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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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빠른 속도로 언덕을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아, 조심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대로변은 아니었으나 자동차가 꽤 자주 오가는 이면 도로였다. 봄 햇살 속에서 반짝이며 구르듯 내달리는 아이는 제 속도를 조절하거나 적절한 순간에 멈추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아이 뒤를 따라 종종 걸음으로 내려오던 남자가 비명을 지르는 나를 흘낏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인 내가 뒤쫓아 가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듯한 웃음.

괜한 오지랖으로 소란을 떨었나 싶어 머쓱해져 서둘러 언덕을 올랐다. 그런데 몇 발자국 움직이기도 전에 자동차가 급정거하는 마찰음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뒤통수가 서늘했다. 남자의 고함 소리와 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뒤 돌아 보니 아이는 아스팔트 도로 위에 넘어져 있었고, 바로 앞에 은빛 자동차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 멈춰 서 있었다. 서둘러 달려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그가 아이 곁에 이르러 손을 내미는 것을 보고 나는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바람결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속절없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을 거야. 무릎이나 손바닥이 조금 긁혔겠지. 놀랐겠지. 하지만 울지 마. 사소한 상처들은 치명적 상처를 미리 방지하기도 하니까. 상처는 곧 아물고 굳은살이 생길 거야. 그러니 울지 마라...

혼잣말을 하던 나는 화들짝 놀란다. 왜 울지 말라고 하는 거지? 달려가는 아이를 보고 조심하라고 소리치다가, 아이가 넘어져서 다치니까 울지 말라고 다그치는 것.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어른들의 행동을 나도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위험한 행동은 아예 하지 말 것. 어쩌다 넘어져 상처를 입는다고 해도 그만한 일에 울지 말 것. 울지 말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것. 물론 몸에 생긴 상처는 아물어 크고 작은 흉터로 남거나 그마저 사라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문득 굳은살이 갑옷처럼 두텁게 덮인 마음을 상상해 본다. 상처를 입지 않는 마음. 상처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마음.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다가 결국 울음 같은 것은 아예 나오지 않게 된 단단한 마음.

강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슬픔도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좌절도 느끼지 않는 걸까. 오래 품어 온 사랑을 거절당해도, 취직 시험에 연거푸 떨어져도, 난데없이 뺨을 맞듯 직장에서 해고를 당해도,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준비된 대본을 읽듯 쉽게 말한다. 울지 마라. 징징거리지 마라. 정신력으로 극복해라. 하지만 그 모든 감정들을 마비시키고 난 뒤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감정은 편리하게 칸막이가 나뉘어져 있는 게 아니다. 감수성은 말처럼 쉽게 선택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강해지기 위해, 흔히 부정적이라고 일컫는 감정을 둔하게 만들어 놓으면, 사소한 기쁨이나 틈틈이 행복을 느끼는 능력, 연민하고 공감하는 능력도 함께 사라지기 마련이다.

지금 이곳에서 쉽게 허용되고 표출되는 감정은 분노와 혐오다. 단단한 굳은살 아래, 결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지만 켜켜이 쌓여 있을 게 틀림없는 아픔과 괴로움 때문에 우리는 잔인하게 타인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정말로 강한 것일까. 자신의 취약함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러내는 공격성은 아닐까.

이제 아이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 마음은 바뀌었다. 두려움이 씻겨나가도록 아이가 실컷 울기를, 그래서 이 세상에 갓 태어났을 때처럼 연약한 몸과 마음으로 돌아가기를, 그 몸으로 다시 한 번 봄 햇살 속으로 반짝이며 튀어 오르기를, 나는 바랐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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