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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겨울전쟁과 평화의 이면

입력
2017.11.08 15:36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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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1월 30일, 겨울로 접어든 핀란드 수도 헬싱키의 음산한 하늘에서 소련군의 폭격이 시작됐다. 같은 해 소련이 혁명의 태생지였던 레닌그라드 일대의 안전을 명목으로 요구한 영토 할양 및 주요 항만 조차를 단호히 거부한 핀란드는 일말의 평화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나, 소련의 확장전략과 강대국 사이의 밀약은 끝내 전쟁을 불렀다. 1932년에 체결된 핀란드ㆍ소련 불가침조약과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이상적 다자안보 구상은 한순간에 무력화됐고, 인구 370만명의 핀란드는 변변한 무기도 없이 26개 사단 50만명이 넘는 소련군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그러나 총을 들 필요도 없을 것이라던 호언과는 달리 이듬해 3월까지 혹한기의 치열한 전투 끝에 소련은 막대한 병력과 무기를 잃고 핀란드와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쟁의 끝은 아니었다. 소련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전선을 동쪽으로 확대했고, 핀란드는 독일과 함께 1941년부터 소련과 새로운 전쟁에 들어갔다. ‘계속 전쟁(Continuation War)’으로 명명된 이 전쟁은 3년 넘게 이어졌고, 독일의 전세가 불안해지면서 다시금 소련의 압력에 직면한 핀란드는 독일군을 영토 밖으로 내모는 라플란트(Lapland) 전쟁을 벌였다. 장장 5년에 걸친 수차례의 전쟁 끝에 핀란드는 소련과 ‘우호ㆍ협력ㆍ상호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거액의 배상금을 물었지만, 독립과 민주주의, 그리고 시장경제를 지켜 냈다. 비슷한 상황에서 전쟁을 피하고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인 발트 3국은 모두 소비에트 연방에 복속됐다. 이후 핀란드는 중립적 입장을 취하며 동서 양진영과의 관계를 유지했고, 75년 헬싱키 협정으로 유럽의 신뢰구축과정에도 참여했다.

약소국이 강대국 옆에서 모호한 중립적 태도로 외교정책의 자발적 예속에 이르는 상황을 일컫는 ‘핀란드화(Finlandization)’라는 말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쓰기 시작했다. 핀란드인들이 혐오하는 용어다. 실제로 냉전 시기 핀란드는 생존을 위해 양방향 외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강대국 소련과의 혹독한 겨울 전쟁을 치른 결기가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동북아 지역의 평화 구축을 위한 여러 논의 가운데는 헬싱키 프로세스와 같은 화해 및 평화협력 기제를 한국이 주도하려는 바람도 있었다. 아울러 EU의 수도가 되어 수많은 국제기구를 유치해 유럽의 가교가 된 벨기에나 국제 무역과 과학기술의 중심지가 된 네덜란드처럼 한국이 동북아 허브가 되자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그때마다 강대국 사이에서 평화를 구축하고 번영을 이루어 낸 이들 국가로부터 여러 시사점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우리가 평화와 공존의 이상형으로 여기는 유럽의 역사는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상흔으로 점철돼 있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유럽 축구 국가대항전에서 축구공이 아니라 무기를 들려주면 상당수는 과거 언젠가 두 나라가 벌였던 전쟁을 재연할지도 모른다. 평화의 이면에는 이처럼 많은 고통과 갈등의 역사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극복해 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일 뿐이다.

한국과 핀란드, 그리고 유럽 ‘강소국’의 상황이 같을 수는 없다. 인구나 역사적 배경도 상이하고, 역내 안보상황 역시 다르다. 그러나 그 생존의 틀 자체는 크게 차별화하기 어렵다. 평화는 쉽게 오지 않는다. 특히 작은 나라가 힘이 강한 나라를 상대할 때일수록 더욱 전략적인 사고를 필요로 한다. 수동적 균형추의 역할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무엇보다 평화는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지켜 내려는 결기를 가진 국가에만 주어진다. 2차 세계대전의 수많은 전사(戰史) 속에 묻혀 온 핀란드의 겨울전쟁에서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평화의 이면에 새겨진 그런 결기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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