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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안전모 폭동(Hard Hat Riot)

입력
2018.05.08 04:42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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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지지 전쟁지지 시위도 있었다. 백인 노동자들이 그 선두에 섰다. 70년 5월 8일의 안전모 폭동이 대표적이다. 사진 게리 위그노랜드. wordpress.com
닉슨 지지 전쟁지지 시위도 있었다. 백인 노동자들이 그 선두에 섰다. 70년 5월 8일의 안전모 폭동이 대표적이다. 사진 게리 위그노랜드. wordpress.com

1960, 70년대 미국 반전ㆍ인권운동사에서 노동운동은 별 존재감이 없다. 오히려 넘어야 할 반동의 벽이었다. 최대 노동조직 미국노동연맹(AFL)은 1860년대 출범할 무렵부터 소수 숙련노동자 중심의 엘리트 직능조직이었고, 1차대전과 대공황을 거쳐 성장하면서도 경제적 이슈 중심의 노조지상주의를 표방했다. 그에 반발해 1905년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이 탄생했으나 임금노동 철폐 등 지나치게 급진적인 이념적 변혁운동으로 치달아 AFL에 대항할 만한 힘을 얻지 못했다.

산별노조회의(CIO)는 대공황기 파업 등 대중운동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AFL에서 쫓겨난 급진파가 1935년 자동차 철강 등 중공업 작업장 비숙련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대항조직이었다. AFL과 CIO 양대 체제는 서로 반목하면서 성장했지만 2차대전 루스벨트 정부와의 협력과 반파시즘이라는 대의 하에 무파업 결의 등으로 뜻을 맞췄고, 그 과정에서 소수의 CIO 좌파 리더들이 다시 축출됐다. 전후의 번영과 정치적 패권주의,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 반공은 노동운동의 이념이 됐다. 조합원 900만 명의 AFL과 600만 명의 CIO는 1955년 12월 1,500만 명의 AFL-CIO로 통합했다. 70년대 초 미국 노동계는 백인-보수의 아성이자 닉슨의 든든한 지지세력이었다.

1970년 4월 30일, 닉슨은 캄보디아 확전과 징병 연장안을 발표, 대학가 반전시위에 기름을 부었다. 5월 2일 오하이오 주 켄트주립대 시위에 주방위군이 처음 등장했고, 이틀 뒤 그들의 발포로 학생 두 명 등 4명이 숨지고 9명이 다쳤다.

5월 8일, 각목을 든 안전모 차림의 뉴욕 건설노조원 200여 명이 월스트리트 페더럴 홀의 반전 시위대 1,000여 명과 충돌했다. 그들은 “총력 USA(All The Way USA)” “싫으면 떠나라 America, love it or leave it” 등의 피켓을 들고 시청을 점거, 켄트대 희생자 추모 조기(弔旗)를 끌어올리며 “빨갱이 시장 물러나라”고 외치기도 했다. ‘안전모 폭동(hard hat riot)’이라 불리는 그 충돌로 70여 명이 부상 당했다. 건설노조위원장이던 피터 브레넌은 72년 재선한 닉슨과 후임 포드 정부의 노동부 장관을 지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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