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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슈퍼맘’의 나라에 미래는 없다

입력
2017.05.24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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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 대비 품질이 좋다’는 의미의 가성비는 지금껏 우리나라 상품 경쟁력의 핵심이었다. 단시간에 선진국 문턱에 올라설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도약을 위해서는 이제는 과감하게 ‘가성비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성비가 좋다는 건 결국 품질에 비해 싼 가격을 매겨야만 팔린다는 뜻 아닌가. 선진국은 다르다. 품질보다 더 비싼 가격을 받아 낸다. 그게 아니라면 품질만큼의 가격이라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해법을 찾자면 원인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어마어마하게 성장한 한국이라는 브랜드에는 여전히 어두운 구석이 있다. 우선 ‘한국’ 하면 외국인들은 밤낮없이 일만 하는 근로자를 떠올린다. 멕시코 다음으로 근로시간이 많은 나라가 한국이란 건 널리 알려진 바다. 일년 내내 휴가도 없이 가족을 팽개치다시피 일한다. 출퇴근 시간도, 일하는 시간도 획일적이다.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런 모습을 이해할 외국인은 없다. 그들에게 ‘한국산’이란, 장시간 근로에 찌들어 녹초가 된 근로자가 만들어 낸 제품으로 비춰질 따름이다.

더 큰 문제는 남성 중심의 직장 문화다. 여성 근로자에 대한 차별은 훨씬 더 심각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남녀 간 임금 격차는 2014년 기준 36.7%였다. OECD 회원국 중 최악의 수준이다. 유리천장 지수도 마찬가지다. 국제여성기업이사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대기업 여성임원 비율이 2.4%로 아ㆍ태지역 20개국 중 최하위였다고 한다. 한국의 워킹맘은 육아와 직장 모두 홀로 감내해야 한다. 무조건 ‘슈퍼맘’이 되어야 한다. 이런 현실을 그대로 두고 여성의 경력 단절을 막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창의적 여성인력 운운하는 것도 꿈같은 얘기다.

‘남자들의 나라’.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알렉시예비치는 얼마 전 한국에 대한 첫인상을 그렇게 밝혔다. 7년 동안 기자 생활을 했던 그녀다. 사회를 꿰뚫는 눈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정보 강국이자 한류문화 수출에도 열심인 우리가 그녀의 지적을 단박에 부인할 수가 없다. 이런 현실이 산업경쟁력을 형편없이 까먹고 있다는 사실을 정작 우리만 모르고 있다. 장시간 근로와 차별에 찌든 근로자가 만들어낸 제품을 기꺼이 비싼 가격에 사고 싶어 하는 소비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일자리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더 비싸게 상품을 팔고, 기업의 이미지도 좋게 하고, 국가 경쟁력도 높이는 비결이다. 말 그대로 1석3조다.

우선 편견을 깨야 한다. 일ㆍ가정 양립은 대기업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중소기업에게 더 적합하다. 효과도 중소기업에게 더 빠르고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 기업 이미지 제고에 큰 돈을 들여 광고하는 것보다 열 배는 낫다. 이 대목에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중소기업이 용기를 내게 만들어 줘야 한다. 안 그래도 대ㆍ중소기업 간 격차가 문제 아닌가. 우수한 인력이 중소기업에 머물 수 있게 해야 한다. 국가의 일ㆍ가정 양립 지원이 중소기업에 집중되어야 할 이유다.

일ㆍ가정 양립정책이 ‘그림의 떡’이 되어서도 안 된다.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현행 육아휴직급여 수준은 통상임금의 40%에 불과하다. 육아휴직을 가라고 떠밀기도 미안할 정도다. 부디 육아휴직급여의 소득 대체율을 획기적으로 높여줄 필요가 있다. 보육시설의 양질화도 필수다.

‘결국 돈이 문제’라며 푸념하기도 한다. 천만에 말씀이다. 여성차별과 장시간 근로관행이 만들어낸 부정적 이미지가 우리 경제에 얼마나 많은 손실을 초래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껌값’에 불과하다.

문재인 정부의 출발이 사뭇 당차다. 인사는 여러모로 감동적이다. 무엇보다 내각의 여성 비율을 3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한 건 박수를 칠 만하다. 실제 외교부장관 후보자에 여성을 지명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그치지 말아야 한다. 이 참에 여성 대법원장은 어떨까. 여성 국방부 장관은 또 어떤가. 한국에도 여성 임원이 있느냐고 되물어보는 외국인이 없어져야 비로소 우리 기업이 산다. 단언컨대 ‘슈퍼맘’이 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나라에 미래는 없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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