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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 총무는 잘라도 그만… 영세사업장은 노동법 사각지대

입력
2015.03.25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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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4시간 격무 참고 일했지만

다른 직원이 사장 고발하자 해고

5인 미만 사업장선 한달 전 통보 땐

합법적 해고 가능… 보호 방법 없어

정부 대책은 대기업부터 적용

외국선 영세사업장 예외 인정 드물어

이영철씨가 25일 퇴직 4개월여 만에 고시원을 다시 찾았다. 이씨는 “‘근로계약서를 그렇게 써놓고 나중에 월급을 더 달라고 소송하는 건 비겁한 짓’이란 말을 들었을 때 상처받았다”며 “소규모 사업장 근로자도 최소한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이영철씨가 25일 퇴직 4개월여 만에 고시원을 다시 찾았다. 이씨는 “‘근로계약서를 그렇게 써놓고 나중에 월급을 더 달라고 소송하는 건 비겁한 짓’이란 말을 들었을 때 상처받았다”며 “소규모 사업장 근로자도 최소한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일 그만둔 고시원 총무들이 임금 체불 등으로 노동청에 사장 고발하는 일이 한두 건이 아닐텐데 그때마다 그 과정을 목격한 직원을 해고했죠. 5인 미만 사업장이니 해고해도 별 다른 대응을 못했고요.”

늦깎이로 대학 입시를 준비했던 이영철(33ㆍ가명)씨는 ‘숙식 해결되고 월급까지 준다’는 말을 듣고 지난해 서울의 고시원 두 곳에서 총무로 6개월간 근무했다. 그러나 이씨가 처음 일한 고시원은 “오는 전화 받고, 입실기간이 지난 방이 어딘지 파악하면 된다”는 사장의 말과 달리 근무강도가 ‘살인적’이었다. 30여 개에 달하는 방과 화장실을 청소하고, 입실자들의 택배를 받아두며, 요청하는 입실자들에게 ‘모닝콜’ 서비스까지 해주는 등 주 7일, 하루 14시간씩 일을 했다. 그렇게 해서 이씨가 손에 쥔 돈은 월 40만원. 이씨는 “일은 고됐지만, 사장이 4대 보험에 가입해줘서 참고 다녔다”고 말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한 지 두 달쯤 지난 뒤 다른 직원이 고시원 사장을 노동청에 고발하겠다며 승강이가 벌어졌고, 사장은 이 광경을 목격한 이씨에게 “고시원 사정이 어려워져 가족끼리 운영하기로 했으니 나가달라”고 통보했다. 열흘 후 이씨가 그만 두자 사장은 고시원 총무 모집 광고를 아르바이트 사이트에 올렸다. 이씨는 “이전 직원이 사장을 고발하는 과정을 지켜본 내가 똑같이 고발할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며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일했던 사실이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다른 고시원의 야간총무 일자리를 얻었지만 사정은 비슷했다.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하루 8시간30분(휴게시간 6시간30분 포함), 주 7일을 근무하고 그가 받은 월급은 51만원. 사장에게 “월급을 적게 주더라도 건강보험은 들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해 이씨와 이씨 가족은 건강보험 지역가입자가 돼 10여만원의 비싼 보험료를 내야 했다.

취업 당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이씨는 낮에 일하는 주간 총무가 사장을 임금체불로 노동청에 고발한 직후에야 근로계약서를 쓸 수 있었다. 그것도 휴게시간이 11시간으로 책정된 계약서였다. 이씨는 “휴게시간으로 표기된 시간에도 계속 근무했고, 근로계약서 내용대로 계산하더라도 최저임금에 훨씬 못 미치는 시급을 받았다”며 4개월 만에 고시원을 그만둔 뒤 노동청에 임금체불로 사업주를 고발했다. 한달 평균 255시간을 근무했으니 시간당 최저임금을 적용하면 월 138만8,550원을 받아야 하는데 그 절반도 받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노동청의 중재는 이뤄지지 않았고, 이씨는 결국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열악한 일자리 일수록 법이나 정부 정책으로 보호받지 못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처럼 노동시장은 복잡다단하게 변하고 있지만, 정부 노동정책과 노동법은 여전히 대기업 제조업 사업장에 맞춰져 있어 열악한 영세사업장의 근로자 처우를 개선하는데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정부의 노동 보호정책은 비정규직 보다는 이미 충분한 보호를 받고 있는 정규직 근로자를 우선시해 노동시장 양극화를 부추긴다는 지적이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근로자에게 유리한 정부 정책은 대기업 근로자에게 우선 적용되고 ‘과호보’를 우려해 내놓은 노동시장 유연화 조치는 영세기업 근로자에 먼저 적용된다”며 “정부 보호대책의 효과마저 양극화되면서 임금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보호대책은 300인 이상 대기업 근로자부터 적용된다. 60세 정년연장은 2016년 300인 이상 대기업과 공공기관에 적용되고, 2017년 이후 300인 미만 중소기업에 적용된다. 퇴직연금제도 의무화 역시 내년부터 300인 이상 대기업에만 적용된다. 2022년이 돼야 모든 사업장에 적용된다.

또 근로기준법 등의 노동보호 대상은 5인 미만 사업장, 주 15시간 미만의 초단시간 근로자는 제외돼 있다. 민주노총 법률원 관계자는 “5인 미만 사업장에선 한달 전 통보하면 합법적으로 해고가 가능하기 때문에 해고 상담이 들어와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특히 5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1일 8시간의 법정근로시간 준수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사업주는 주 5일, 40시간 법정근로시간을 준수할 의무도 없다. 법정근로시간이 없으니 연장근로, 야간근로, 휴일근로에 대한 50%의 가산임금도 적용되지 않는다. 사업주가 취업 당시 합의한 근로조건을 위반해도 근로자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

주 15시간 미만의 초단시간 노동자는 1년 이상 일해도 퇴직금을 받지 못하며, 해고 시 실업급여 혜택도 없다. 건강보험, 국민연금 가입 대상에서도 제외돼 이들이 가입할 수 있는 사회보험은 산재보험 뿐이다.

레미콘 기사, 학습지 교사, 골프장 캐디 등 자영업자와 근로자의 중간적 성격인 특수고용직은 보호법안 조차 없다. 정부는 영세사업장의 열악한 경영 여건과 근로감독 한계 등을 이유로 이들을 근로기준법 일부 조항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지만, 소규모 사업장일수록 근로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에 ‘이중 차별’이라는 지적이 이어진다.

이철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외국 사례에 비춰보면 사업장이 영세하다고 해서 일률적으로 법 적용의 예외를 인정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며 “현실을 감안하면 근로기준법은 오히려 영세사업장에 더 적용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5인 미만 사업장 근로자는 2013년 기준 348만1,000명, 주 15시간 미만의 초단시간 노동자는 47만2,000명에 달한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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