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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의 인도 소설가… 불가촉천민에 명예를 되돌리다

입력
2016.09.03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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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스웨타 데비는 근 60년 동안 카스트 바깥의 불가촉천민 '달리트(Dalit)'들의 이야기를 써온 인도 소설가다. 그는 그들과 더불어 생활하며 인간으로서의 자존과 공동체적 명예를 되찾아주고자 소설을 썼고, 자신의 문학적 영광은 그리 안중에 두지 않았다. ‘서발턴(subaltern)’의 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은 ‘차별’이라는 뭉툭한 말로 희석돼온 달리트들의 삶의 대위서사이자 역사로써 데비의 작품을 분석하고 연구했다. 위키피디아
마하스웨타 데비는 근 60년 동안 카스트 바깥의 불가촉천민 '달리트(Dalit)'들의 이야기를 써온 인도 소설가다. 그는 그들과 더불어 생활하며 인간으로서의 자존과 공동체적 명예를 되찾아주고자 소설을 썼고, 자신의 문학적 영광은 그리 안중에 두지 않았다. ‘서발턴(subaltern)’의 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은 ‘차별’이라는 뭉툭한 말로 희석돼온 달리트들의 삶의 대위서사이자 역사로써 데비의 작품을 분석하고 연구했다. 위키피디아

천민 삶 담은 기록의 문학

곡쟁이ㆍ여성 게릴라ㆍ유모 등

카스트 바깥의 비참한 생활

100편 넘는 작품 속 고스란히

인도 평단선 평가 엇갈리지만

주류 문단 “문학적 기교 부족”

세계적 비평가 스피박은 극찬

“지식인 페미니스트의 이상”

‘어머니 인도’ 신화를 깨다

간디 비폭력 운동으로 대표된

민족주의가 감춘 착취의 역사

꼼꼼히 적어내 하층민 일깨워

마하스웨타 데비(Mahasweta Devi)는 인도의 소설가로 무려 100여 편의 장편과 20여 권의 단편집을 냈다. 그는 인도 동북부 저개발지역의 떨려난 부족들과, 달리트(Dalitㆍ억압 받는 사람들)라고 불리는 카스트 바깥의 천민들, 특히 여성들의 이야기를 주로 썼다. 그에게 소설은 예술 이전에 기록이었고, 글쓰기는 일종의 소명이었다. 그래서 작품의 질 못지않게 양이 중요했다. 그는 누구보다 먼저 글 읽기에 서툰 달리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읽고 자존으로 당당해지기를 바랐다.

그는 스케일과 테크닉으로 무장한 샐먼 루슈디와 달랐고, 단 한편의 작품(‘작은 것들의 신’)으로 맨부커상을 탄 아룬다티 로이와도 달랐다. 물론 그는 인도의 유명 작가였고 약자의 이해와 인권을 대변한 지식인이었지만, 주류 문단은 대체로 그의 문학을 얕잡아본 듯하다. “(몇몇 예외는 있지만) 고급문학의 테이블에 놓이기에 그의 작품들은 너무 직설적이고 지적ㆍ문학적 기교도 부족”하다는 것, “인도의 부족민들을 악당 같은 지주와 싸우는 성자들로 단순화했다”는 거였다. 데비의 대표작들을 극찬하며 앞장서 영어로 번역 출간하고, 비평가로서 그의 작품을 분석함으로써 자신의 ‘서발턴(Subaltern)이론’을 심화했던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 1942~)도 그의 주인공들이 지닌 ‘지나치게 고상한 야만(too much noble savage)’의 혐의를 인정했다.

한국어로 번역된 데비의 작품은 아시아문학선 ‘물결의 비밀’에 수록된 단편소설 ‘곡쟁이들’(김석희 번역)밖에 없지만, 데비의 이름과 작품들은 스피박의 저서 및 관련서에 헤아릴 수 없이 자주 등장한다. 데비와 스피박은 서벵골(West Bangal) 주 동향이었고, 나이와 작가-번역가 관계를 떠나 친구였다. 특히 스피박에게 데비는 “벵골 좌파 지식인 페미니스트의 이상”이었다. 하지만 데비는 스피박이 자기 작품을 분석하는 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극찬에 가까운 호평들이었지만, 평단의 악평과 마찬가지로 “데비는 여러 번 ‘그에게도 자신의 견해를 밝힐 민주주의적 권리가 있다’고만 말했다”고 한다.(Indianexpress.com, 16.7.30) 데비에겐 서둘러 만나야 할 새로운 이야기의 주인공들-릭샤꾼, 불볕의 도심 거리에서 일하는 벽돌공, 쫓겨나는 농부들, 농민 게릴라 병사, 성노동자, 유모, 곡쟁이 등-이 너무 많았다.

‘곡쟁이’는 부잣집 상가에서 곡을 대신해주는 노파 ‘사니차리’의 이야기다. 남편과 자식은 먼저 세상을 떴고 며느리마저 먹을 게 없어 장터의 ‘갈보’가 된 처지. 가문의 체면을 위해 초상만큼은 성대하게 치르고 싶어하는 지주들의 경쟁적 욕망 덕에 그는 전문 곡쟁이로 명성을 얻어간다. 곡만 하면 얼마, 땅바닥에 뒹굴면 얼마, 머리까지 찧으면 얼마, 화장터까지 따라가면 또 얼마…. 그는 곡쟁이 일을 함께 시작한 친구가 죽어도 울지 않는다. “돈 쌀 옷, 이런 것들을 대가로 얻지 않는다면, 눈물은 쓸모 없는 사치다.”(책 238쪽) 어느 날 큰 부자가 장례에 돈을 아낌없이 쓰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자 사니차리는 장터의‘갈보’들을 죄다 곡쟁이로 불러 모아 악취 나는 부자의 송장을 둘러싸고 통곡한다. “마름은 슬픔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아무것도 남지 않겠어! 교활한 사니차리! 그들이 머리를 바닥에 찧는 것은 요금을 두 배로 주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소설은, 송장이 된 부자의 첩으로 살다 쫓겨나 갈보가 된 한 여인이 히죽 웃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의 대표작 ‘젖어미(Breast Giver)’는 일하다 불구가 된 남편을 부양하느라 브라만 가정의 유모가 된 천민 여성 ‘자쇼다’의 이야기다. 그는 유방암에 걸리지만,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아이에게 젖을 물린다. 비평가 스티븐 모튼은 책 ‘스피박 넘기’(이운경 옮김, 앨피)에서 “(스피박에게) 자쇼다의 병들고 착취당한 모성적 육체는 ‘어머니 인도’신화의 한계를 드러내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구조물”(79쪽)이라고 썼다. 영국 식민지배에 맞선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 ‘사티아그라하(Satyagrahaㆍ진리를 향한 헌신)’는 “시골 농민과 여성을 포함한 서발턴 집단의 정치적 지지를 동원하기 위해 민족주의 담론에서 사용하는 ‘어머니 인도’의 은유를 공공연히 확장했다.”(22쪽) 1947년 독립한 인도를 30여 년 간 지배한 집권 회의당은 간디의 민족주의 운동을 계승한 정당이었다.

인도 12억 인구의 약 17%(2억 명)가 달리트다. 인도의 법은 그들을 평등한 시민이라 규정하고 있지만, 일상에서는 여전히 힌두법과 카스트 관습이 실정법 위에 있다. 달리트는 크게 넷으로 나뉘는 카스트의 계급 구조에도 끼이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이다. justice-network.org
인도 12억 인구의 약 17%(2억 명)가 달리트다. 인도의 법은 그들을 평등한 시민이라 규정하고 있지만, 일상에서는 여전히 힌두법과 카스트 관습이 실정법 위에 있다. 달리트는 크게 넷으로 나뉘는 카스트의 계급 구조에도 끼이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이다. justice-network.org

인도 하층민들의 삶은 60년대 중반 한계 상황에 이르렀고, 서부 산업벨트와 동부 농촌지역의 경제적 격차도 극심해졌다. 그 결과가 1967년 서벵골 낙살바리에서 시작된 마오주의‘낙살 반군(Naxalite) 봉기’였다. 데비의 또 다른 작품 ‘드라우파디 Draupadi’는 낙살 게릴라 여성 ‘돕디 메즈헨’의 이야기다. 메즈헨을 집단 강간한 경찰이 옷으로 덮어주자 그는 그 옷들을 찢고 일어나 자신을 강간하도록 명령한 경찰서장 앞에 알몸으로 감연히 선다. “허벅지와 음모에는 피가 말라 엉겼고, 두 가슴도 상처 투성이였다.(…) 서장은 비무장한 적에게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끔찍한 공포를 느낀다.”(이코노미스트, 16.8.11) 스피박은 그 소설 속 상황을 “변화하는 역사적 순간에 혁명 내부에서 일어난 여성의 투쟁에 관한 알레고리”로 파악했다.(모튼, 책 107쪽)

그렇게 데비는 민족주의ㆍ자본주의ㆍ남성 지배권력이 감춘 역사, 신분 차별과 지역ㆍ빈부 격차, 가부장제와 성 억압ㆍ착취 등 보편의 언어로 희석되곤 하는 폭력의 구체적 양상을 기록했고, 스피박은 ‘억압받는 이들’의 육성으로 쓰여진 그의 대위서사를 통해 서구 후기식민주의 연구자들이 놓친 제3세계 서발턴의 복잡한 층위를 연구했다.

마하스웨타 데비는 1926년 1월 14일, 지금은 방글라데시에 속하는 동벵골 다카(Dacca)에서 태어났다. 어머니(Dharitri Devi)는 작가 겸 사회사업가로 문맹 소녀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아버지(manish Ghatak)는 30년대 인도 문학 아방가르드 운동을 주도한 저명한 작가였다. 조각가 외삼촌(Sankha Cahudhury)은 좌파 주간지 ‘Economic and Political Weekly’를 창간해 편집인으로 일했고, 삼촌(Ritwik Ghatak)도 꽤 유명한 좌파 영화인이었다.(NYT, 위 링크) 데비는 13살 때부터 소설 습작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인도 시인 타고르가 설립한 국립 비스바바라티(Visva-Bharati)대학 영문학과를 나와 캘커타대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인도인민연극협회(IPTA)를 설립한 저명 극작가 비욘 바타차리아(Bijon Bhattacharya)와 47년 결혼해 이듬해 아들 나바룬(Nabarun)을 낳았다. 나바룬(2014년 사망) 역시 작가 겸 급진적 비평가로 활동했다. 부부는 64년 이혼했고, 데비는 작가겸 저널리스트 아시트 굽타(Asit Gupta)와 재혼했다가 아이 없이 76년 이혼했다.

60년대 초까지 데비는 저널리스트 겸 강사로 일했다. 그가 강의한 학교(Bijoygarh College)는 하층민 여성 교육기관이었고, 그의 강사 일은 일종의 봉사활동이었던 듯하다. 우체국에 잠깐 근무하다 공산주의 사상 때문에 해고된 적이 있는데, 거기서도 데비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의 영어 편지를 대신 써주곤 했다고 한다.(The Wire, 위 링크) 작가로 데뷔한 건 30세이던 1956년, 데뷔작은 1857년 세포이항쟁의 주역이었던 토호국 잔시의 여왕 락슈미바이를 모델로 한 ‘The Queen of Jhansi’였다.

그가 ‘여왕’과 ‘민족’에게서 돌아서서 달리트들의 부락으로 들어선 까닭도 60년대 인도의 절망적인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지역들을 탐사 취재하며 영어로 기사를 썼고, 벵골어로 소설을 썼다. 다양한 부족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과학적이고 섬세한”요리법 등을 배우고 방언을 익혔고, 콜카타의 집에 돌아와선 글쓰기에, 어떨 땐 하루 18시간씩 매달렸다고 한다. 그렇게 작품을 다 쓰고 나면 비평가들이 뭐라 하건 아랑곳 않고 다시 길을 나서곤 했다. 93년 작품집 ‘가상의 지도들 Imaginary Maps’ 서문에 그는 “한 부족민 소녀가 내게 수줍게 질문한 적이 있다. ‘학교에 가면 우린 늘 간디에 대해 배운다. 우리 부족에는 영웅이 없나? 우리는 늘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명예를 되돌려주고자 한다. 그들은 부족민으로서 자부심을 갖기를 원한다”고 썼다.(thehindu.com, 16.8.3) 그는 “내 글쓰기의 영감은 늘 착취당하고 이용당하면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 이들에게서 온다. 그들의 놀라운 고결함과 인간적 고통이 내 작품의 고갈되지 않을 원천이다”(indiatoday.in, 16.7.28)라고도 했고, “가장 서사의 귀중한 소재는 평범한 이들의 기억 속에 보존돼 있다”(NYT)고도 했다. 낙살게릴라로 활동하다 숨진 아들의 시신을 찾아가는 어머니의 이야기(‘Mother of 1084’ㆍ1084는 시신 번호), 영국 자본에 맞서 마을의 숲을 지키려다 숨진 인디언 부족장 비르사 문다(Birsa Munda)의 이야기(‘The Occupation of the Forest’) 등이 그렇게 쓰여졌다.

그의 성격은 꽤나 괄괄했던 듯하다. 첫 남편은 The Wire 에세이에서 “데비는 처음 보는 이와 점잖은 대화를 나누다가도 언제 그에게 사기꾼이라며 화를 낼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썼다. 그는 서벵골의 오랜 집권당이던 마르크스공산당(CPIM)을 지지했으나, 그들의 투항적 신자유주의 노선이 확실시된 2000년대 이후, 특히 2007~08년 인도 ‘따따 자동차’회사의 초저가 자동차 ‘나노’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싱구르 영세 농민들의 토지를 반강제로 수용하려 한 파동과 인도네시아 살림(Salim)그룹의 화학공장을 유치하기 난디그람에 경제특구를 만들면서 저항하는 농민을 무력 진압(14명 사망)한 뒤부터, 격렬한 반 CPIM 활동을 전개했다.(‘현대인도저항운동사’한형식 등 지음, 그린비) 그 무렵 ‘the Indian Express’ 인터뷰에서 보복이 신경 쓰이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가탁의 조카이고 바타차리아의 아내다.(…) 나는 두려움이 뭔지 모른다”고 말했고, 작가와 활동가의 삶을 어떻게 동시에 유지하냐는 질문에는 “어리석은 질문 그만하라. 내 글쓰기가 곧 내 활동이다”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그는 회의당에서 분리돼 나온 마마타 바네르지(Mamata Banerjee)의 트리나물의회당(Trinamool Congress)을 지지했고, 트리나물의회당은 2011년 총선에서 34년 집권 공산당을 누르고 서벵골주 다수당을 차지, 바네르지가 주 수상이 됐다.

2010년 데비를 인터뷰한 ‘theREAD’의 기자는 하지만, 그가 그렇게 친절할 수 없었다고 썼다. 이념에 대해 데비는 “내 모든 작품은 실제 사건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일 뿐, 특정 이념을 염두에 두고 쓰지는 않는다”고 말했고, 젊은 여성이던 기자가 “나도 결혼하지 않고 당신 같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당신은 젊고 사랑에 빠져 결혼도 하게 될 거다. 평범한 이들처럼 당신의 삶을 살면서, 가능한 한 많은 경험을 하라. 그 경험들이, 행복한 것이든 슬픈 것이든, 우리를 작가가 되게 한다”고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그는 96년 라몬 막사이사이상을 비롯, 인도 샤하티야 아카데미 문학상(1979) 등 몇 차례상을 수상했다. 96년 받은 즈난피스상 상금으로 서부 구자라트 주 아마다바드 츠하라(Chhara) 부족의 극단(Budhan Theatre, 1998)을 설립했다. 츠하라는 식민지시절인 1871년 영국이 ‘범죄부족’으로 낙인 찍은 이래 최하층 천민으로 교육조차 못 받던 부족 중 하나였다. 현재 츠하라 부족민 대다수는 글을 읽고 쓴다. 22살 청년 시절 데비를 처음 만나 다큐멘터리 작가가 된 츠하라 부족의 바즈란제(Bajrange)라는 이는 “데비가 아니었다면 우리도 조상들처럼 ‘살기 위해’ 도둑으로 살았을지 모른다”고 말했고, 그 사연을 전한 기자는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데비를 보라”고 썼다.(the Read, 위 링크)

데비는 자기 소설 주인공이기도 했던 인도 동부 자르칸드주의 영웅 비르사 문다의 동상이 영국인에게 체포된 당시처럼 사슬에 묶인 형상인 걸 못마땅해 하며 “인도가 해방됐는데 왜 그는 여전히 묶여 있냐?”고 불평하곤 했다. 자르칸드 주정부가 동상에서 사슬을 없애겠다고 발표한 건 지난 6월이었다. 한 해 전부터 심장과 신장 등 장기 기능 쇠약으로 병원을 오갔던 데비는 그 무렵 콜카타의 벨 뷰 클리닉에 입원 중이었다. 그는 7월 28일 별세했다. 향년 90세.

지난 8월 15일 인도 서부 아마다바드에서 열린 달리트들의 차별 반대 집회 장면. 유튜브.
지난 8월 15일 인도 서부 아마다바드에서 열린 달리트들의 차별 반대 집회 장면. 유튜브.

데비가 사경을 헤매던 그 무렵,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 우나(Una)라는 마을의 달리트 남자 네 명이 죽은 소의 가죽을 벗겼다는 죄목으로 노예처럼 묶여 상위 카스트 남자들에 의해 혁대와 쇠막대로 폭행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드물지도 않은 그 장면이 영상으로 촬영돼 SNS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 직전에는 사원에서 물을 마신 13세 달리트 소녀가 폭행을 당한 일도 있었다. 외신은 인도 서부 아마다바드에서 벌어진 달리트들의 대규모 항의 시위 소식과 함께 인도의 NGO ‘달리트 인권 국민운동(NCDHR)’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우나 사건은 우리 투쟁의 전환점이다. 달리트 공동체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형태의 편견과 차별에 맞서 저항할 것이다.” 말년 정치적 견해 차이로 사이가 틀어졌다가 데비가 숨지기 두 달 전 만나 옛 정을 회복했다는 스피박은 데비의 부고 제목을 ‘The Life Immortal’이라 달았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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