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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상처를 그림책 창작의 원천으로...67세 '괴짜 천재'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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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상처를 그림책 창작의 원천으로...67세 '괴짜 천재'의 자화상

입력
2014.12.19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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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말리는 음악가 트레몰로’

토미 웅거러 글ㆍ그림

밤낮으로 연주하는 열정적인 트레몰로 때문에 이웃들은 괴로워한다. 위층의 점쟁이 아줌마가 저주를 걸고, 트레몰로가 연주할 때마다 악기에서 딱딱하고 까만 음표가 끝없이 솟아난다. 몇 번의 음표 소동 끝에 도시에서 쫓겨난 그는 외딴 숲 속에서 마음껏 연주하며 산다. 음표가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음표들을 팔아 부자가 되고 유명해진다. 약 오른 점쟁이 아줌마는 저주를 취소한다. 트레몰로는 음표 공장을 팔아 연주회장을 짓는다.

대담한 익살이 넘치며 때론 그로테스크한 그림으로 (성마른 점쟁이 아줌마는 풍만한 복부에 커다란 눈동자가 달려있다) 자유분방한 이야기를 펼쳐놓는 이 책을 읽고 단숨에 작가 토미 웅거러에게 매료됐다.

그는 그림책을 분홍빛 화사한 세계에 가둬놓지 않았다. 아이들을 잡아먹던 거인이 영웅이 되고(‘제랄다와 거인’) 강도들이 고아들을 거두어 주고(‘세 강도’) 혐오동물인 뱀이 처음으로 그림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며(‘크릭터’) 고양이 부부의 친아들인 개를 통해 차별과 편견을 풍자하는(‘개와 고양이의 영웅 플릭스’) 등 사회의 흑백논리에 도전했다. 어린이들의 유연성과 용기를 믿었던 웅거러는 그림책의 새 장을 열었고 그의 작품들은 현대 그림책의 새로운 고전이 됐다.

그 독창성과 혁신성의 근원이 궁금하던 중 다큐 영화 ‘토미 웅거러 스토리’를 보았다. 웅거러는 1ㆍ2차 대전 때 독일과 프랑스가 번갈아 통치했던 알자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1931년 태어났다. 그가 지닌 삶의 열정은 전쟁의 공포에서 비롯됐다. 전쟁 중에 나치에 저항하는 그림을 그려 퇴학당할 뻔 했지만, 종전 후엔 프랑스인들에게 냉대 받았던 그는 어린 나이에 역사의 허무를 깨닫는다. 25세에 동경하던 미국으로 떠난 그는 광고와 포스터 일러스트로 이름을 떨치고 그림책 작업도 하게 된다. 베트남전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포스터를 그리던 웅거러는 성문화의 혁명, 에로티시즘에 눈을 뜨고 포르노 일러스트와 그림책 작업을 병행했다. 그는 그림으로 세상과 싸워 시대의 감각을 바꾸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책은 결국 미국 아동도서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도서관에서 퇴출된다. 1971년 캐나다의 오지로 떠난 웅거러는 돼지를 키우며 살다가 아일랜드로 가서 ‘알자스인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귀향한다.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목격한 그는 방랑을 끝내고 25년 만에 그림책 작업을 재개, 독일과 프랑스 교과서에 작품이 실리고 프랑스 명예 작위를 받는다. 백발의 노인이 된 웅거러는 “아동도서계의 여권을 재발급 받았다”며 기뻐한다.

‘못 말리는 음악가 트레몰로’를 웅거러는 67세에 창작했다.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을 반추하며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괴짜 천재’ 예술가 웅거러의 자화상 같은 작품이다. 트레몰로가 도시에서 쫓겨나 숲 속으로 간 것은, 웅거러가 미국 아동도서계에서 퇴출돼 캐나다에서 칩거한 것을 닮았다(원제가 ‘Tortoni Tremolo: The Cursed Musician’, ‘저주받은 음악가 트레몰로’인데 ‘못 말리는 음악가’와는 뉘앙스가 다르다). 음표가 솟아나는 저주를 인기와 부의 재료로 반전시킨 트레몰로는 전쟁의 상처를 창작력의 원천으로 승화시킨 웅거러의 분신이다. 웅거러는 프랑스인과 독일인, 생과 죽음, 아이의 천진함과 포르노의 섹슈얼리티를 넘나드는 삶을 통해 경계를 뛰어넘는 법을 터득했다. 위기가 닥쳐도 음악을 놓지 않았던 낙천적인 트레몰로처럼 웅거러도 그림책을 놓지 않았다. 25년의 공백을 거뜬히 뛰어넘어 더 성숙한 작가로 성장했다.

저주가 거둬지고 큰 돈을 벌게 해주는 음표를 생산할 수 없게 된 트레몰로는 오히려 기뻐한다. 예술은 그 자체로 예술가에게 보상이라는 사실을, 긴 방랑을 통해 깨달은 웅거러가 트레몰로의 입을 빌려 유머러스하게 속삭인다. “귀에 감기는 진짜 음악보다 더 좋은 건 없지! 음악은 뭐니 뭐니 해도 배 속으로 집어삼키는 것보다 귀로 듣는 게 훨씬 더 아름다워!”

김소연기자 au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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