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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와의 전쟁' 현장 가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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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와의 전쟁' 현장 가 보니…

입력
2015.04.2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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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엽사들 신고받고 출동, 사냥개 6마리 풀어 혈투 끝 제압

"농사 지어 고스란히 바치는 꼴" 농가, 퇴치할 묘책 없어 한숨만

농작물 피해를 입힌 멧돼지를 잡기 위해 16일 야생생물관리협회 관계자가 사냥개와 함께 전남 순천시 인근 야산을 오르고 있다.
농작물 피해를 입힌 멧돼지를 잡기 위해 16일 야생생물관리협회 관계자가 사냥개와 함께 전남 순천시 인근 야산을 오르고 있다.

“어젯밤에 다녀갔구만. ‘새발’이여.”

지난 16일 오전 11시 전남 순천시 삼거동 1,500여평 대나무밭. 야생생물관리협회 순천지회장 이원일씨가 길이 8㎝ 발자국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좇았다. 새발은 새로 난 발자국을 뜻하는 엽사 은어다. 멧돼지를 잡기 위해서는 새발을 찾아야 한다. 멧돼지의 행동반경이 25㎞나 되기 때문에 ‘묵발(오래 된 발자국)’을 발견했다면 멧돼지는 이미 현장을 한참 벗어난 후다.

“쩌그여(저기야). 쩌기 멧돼지가 있을 것이여.” 난봉산(546m) 자락과 이어진 대밭 뒤편 야산을 훑어보던 이씨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멧돼지는 보통 참나무나 도토리나무 등 활엽수 지역에 휴식처를 마련한다. 이씨는 산세만 봐도 멧돼지가 있는 곳을 짐작할 수 있는 베테랑 엽사다. 농민들이 순천시에 멧돼지 피해 신고를 하면 시가 운영하는 기동포획단에서 활동 중인 이씨가 출동한다. 파종기이자 멧돼지 출산 철인 봄에는 하루 6, 7건, 가을 수확기 때는 하루 10~15건의 신고가 들어온다고 했다. 현장을 둘러본 이씨는 이날 오후 사냥개 6마리를 데리고 협회 전무이사인 양종국씨와 다시 이 곳을 찾았다. 하운드 잡종인 사냥개를 풀자 눈 깜짝할 새 야산으로 내달렸다. 그 뒤를 두 사람이 따랐다. 최고 속력이 시속 40㎞에 이르는 멧돼지를 사람 발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 가까이 접근하더라도 개보다 10배는 발달된 후각으로 사람 냄새를 먼저 맡고 도망간다. 사냥개들은 멧돼지를 발견하면 ‘왈왈’ 짖으면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는 ‘왈왈이’와 물고 늘어지는 ‘물치기’로 역할분담이 돼 있다. 이씨의 예상대로 멧돼지는 거기 있었다. 길이 1m40㎝, 무게 200㎏의 3년생 수컷이었다. 사냥개와 멧돼지간에 5분을 넘기는 혈투가 벌어졌다. 얼굴과 뒷다리를 번갈아 공격했지만 멧돼지의 저항이 거셌다. 힘이 빠진 멧돼지가 사냥개에 제압당해 옴짝달싹 못하는 틈을 타 엽사가 총기로 숨을 끊었다. 물치기 2마리도 멧돼지의 날카로운 송곳니에 받혀 숨을 거뒀다. 죽은 사냥개 앞다리에 지름 2㎝ 구멍이 뚫려있었다. 멧돼지 포획 과정에 사냥개가 다치거나 죽는 일은 흔하다.

“에이그, 이 나쁜 놈!” 대밭 주인 임봉원(62)씨는 네 다리를 허공에 뻗은 채 숨이 끊어진 멧돼지를 보고 소리쳤다. 이 녀석 때문에 이틀 전부터 밤 잠을 설쳐가며 2시간마다 4번씩 대밭 순찰을 돈 탓이다. 폭죽을 터뜨리고, 개 두 마리로 보초를 세워봤지만 멧돼지는 비웃듯이 밤마다 내려와 죽순 밑동을 파먹었다. “하루 저녁에 20개씩 먹어 치워. 먹을 게 없어질 때까지 계속 내려온다니까.” 멧돼지는 꼭 죽순 뿌리만 먹는다. 다음해 생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보통 30㎝ 정도 자란 죽순을 4월 초부터 수확해 내다 파는데 지난해는 멧돼지 때문에 절반밖에 수확하지 못했다. 20년 전만 해도 순천 근방에 멧돼지가 내려오는 일은 없었다. 주식이 도토리였기 때문에 산 속에서만 살았다고 한다. 이 순천지회장은 “이제는 멧돼지가 민가와 경작지까지 내려와서 뭐든 먹어 치워 농민들의 큰 우환”이라고 말했다.

순천시 상사면 초곡리에 사는 박윤찬(57)씨는 지난해 300평 밭에 고구마를 심었다가 멧돼지에게 고스란히 갖다 바쳤다. 입에 붙일 것도 수확하지 못했다. 박씨는 “이 동네에서는 고구마 농사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구마는 멧돼지가 제일 좋아하는 먹이다. 1,700평 경지에 심은 매실나무 150주도 멧돼지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작년 12월 두 마리가 포획된 후 멧돼지 발길이 뜸하더니 새로운 멧돼지들이 다시 내려와 매실나무 뿌리를 파헤쳐놨다. 뿌려놓은 거름 속의 지렁이를 먹기 위해서였다.

멧돼지는 단맛이 나는 고구마, 벼, 밤, 감, 옥수수 등을 좋아하지만 가리는 게 없다. 한번에 10㎏ 이상을 먹어 치울 정도로 대식가다. 뾰족한 주둥이와 날카로운 송곳니로 땅을 뒤엎어 멧돼지가 지나간 논밭은 쑥대밭이 된다. 농가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해 멧돼지로 인한 전국적인 농작물 피해는 42억여원. 유해조수로 인한 전체 피해액(108억8,000만원)의 40%에 육박한다. 10여년 전만해도 까치 피해가 가장 컸지만 지금은 고라니(23억9,000만원), 까치(17억1,000만원) 피해를 압도하고 있다. 한 농부는 “멧돼지가 농지를 휩쓸고 가면 탱크가 밀고 간 듯 초토화한다”며 “고라니 피해는 애들 장난 수준”이라고 말했다.

포획한 멧돼지를 성인 남성 3명이 힘겹게 옮기고 있다.
포획한 멧돼지를 성인 남성 3명이 힘겹게 옮기고 있다.

포획과 수렵뿐 아니라 농민들은 전기울타리와 철망, 기피제 등으로 멧돼지를 막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한계가 여실하다. 순천시 비봉산 중턱에서 주말농장을 가꾸는 오철규(75)씨는 “밭에 철망을 두른 후 근방에서 고구마 수확을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부 농민들은 전기울타리를 치기도 했다.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지난해 발표한 ‘멧돼지 서식지 이용 특성 파악 및 피해방지기술 개발’ 보고서에 따르면 철망을 설치하더라도 멧돼지는 아래쪽 흙을 파서 침입했고, 전기울타리 역시 누전 방지를 위한 지속적 관리를 하지 않으면 피해 예방에 큰 효과가 없었다. 특히 전기울타리의 경우 정부가 설치비의 60%를 지원하지만 40%를 자가부담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영세농민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일부 지역에만 전기울타리를 칠 경우 울타리가 없는 인근 경작지에 피해가 몰릴 수도 있다. 순천 가곡동에서 주말농장 900평을 경작하는 공숙자(55)씨는 “전기울타리를 치고 싶지만 시에 책정된 예산이 적어 우리까지 순서가 오지 않는다”고 울상을 지었다.

순천=권영은기자 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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