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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마라톤의 도시 보스턴

입력
2017.06.27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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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을 사랑한다. 어릴 때부터 그래야 한다고 선생님과 아버지께 배웠다. 나는 진정 미국을 사랑하지만 미국에 가보지는 못했다. 아마도 너무 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 대해 잘 모른다. (이게 사랑인가?) 뉴욕은 자연사박물관, 샌프란시스코는 익스플로라토리움 과학관, LA라고 하면 갈비 정도가 떠오르는 게 전부다. 그렇다면 보스턴은? 물론 마라톤이다.

보스턴 마라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마라톤 대회다. 어린 시절 스스로 반공소년을 자처했으며 심지어 요즘도 태극기를 든 노인들을 보면 막 달려가서 껴안고 싶은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나에게 보스턴 마라톤은 단순한 대회가 아니다. 보스턴 마라톤은 내 애국심의 원천이기도 했다. 1947년 당시 24세였던 서윤복이 2시간 25분 39초라는 세계 신기록을 세우면서 우승했고, 1950년에는 지금은 비록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한국인 선수 세 명이 1~3등을 휩쓸었다. 이 네 사람으로 인해 대한민국인의 기상이 세계만방에 이르렀다고 배웠다. 2001년에는 이봉주가 다시 우승했으니, 보스턴이라고 하면 마라톤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해마다 4월이 되면 보스턴 마라톤 대회 소식을 기다리게 된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내 애국심을 보충해 줄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지 꽤 됐다. 그러던 중 117회 대회 때 비극이 발생했다. 2013년 4월 15일. 이미 우승자가 결승선을 통과한 지 두 시간쯤 지난 다음이었다. 프로 선수들은 경기를 마쳤고 일반 시민 선수들이 결승선으로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결승선 앞 180m 떨어진 두 곳에서 12초 간격으로 폭발이 일어났다. 총탄에 쓰는 화약을 채우고 볼 베어링과 못을 집어넣은 압력밥솥이 터진 것이다. 가족과 친구 마라토너들의 귀환을 기다리던 시민 세 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다쳤다. 그 가운데 열세 명은 팔다리가 절단 되는 중상을 입었다.

사고가 난 지 11개월 후인 2014년 3월 밴쿠버의 TED 강연장. MIT 기계공학과의 휴 허(Hugh Herr) 교수는 ‘달리고 등산하고 춤추게 하는 새로운 인체 공학’에 대한 강연을 마치면서 한 쌍의 댄서를 무대에 올렸다. 두 사람은 엔리케 이글레시아스의 노래 ‘링 마이 벨(Ring my Bells)’에 맞춰 춤을 잠깐 춘 후 객석을 향해 섰다. 여자 댄서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바로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테러로 다리를 잃은 에이드리언 헤슬릿-데이비스. 그녀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남편의 골인 장면을 기다리다가 폭탄 테러로 왼쪽 다리 무릎 아래를 잃었다. 그녀는 댄서였다.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기술이 그녀를 구원했다.

청중들은 기립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유튜브 동영상으로 강연을 보면서 울었다. 기술이 인간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에이드리언의 춤을 본 휴 허는 “인간은 결코 굴복 당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다. 휴 허는 등반가였다. 8살 때 3,544m의 템플산을 올랐고 17세에는 이미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암벽등반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던 중 1982년 겨울 암벽등반 때 조난을 당해 양쪽 다리를 무릎 아래까지 절단해야 했다.

휴 허는 다시 산을 오르고 싶었다. 물리학과 기계공학 그리고 생체물리학을 공부했고 MIT에서 웨어러블 로봇, 즉 착용할 수 있는 로봇을 연구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개발한 로봇을 착용하고 수천m의 산을 오르고 암벽등반을 하고 있다. 이제 장애인을 위한 인공팔과 다리, 생각만으로 로봇 팔을 조종하는 뇌-기계 인터페이스는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고 있는 셈이다.

로봇 팔과 다리는 더 이상 뉴스거리가 안 된다. 흔한 일이 되었다. 심지어 작년 10월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로봇 슈트를 착용한 채 미션을 수행하는 사이배슬론(Cybathlon) 대회가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웨어러블 로봇이 개발되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고 있다. 지금과 같은 발전 속도라면 현재와 같은 장애인 올림픽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럴 때마다 상투적인 고뇌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기계가 인간 안으로 들어온다면 인간의 정체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도대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안경을 껴도 사람이고 보청기를 껴도 사람이다. 인공심장이 뛰어도 사람이다. 로봇 팔과 로봇 다리를 착용한다고 해서 우리가 정체성을 고민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고민하고 준비할 문제는 따로 있다. 웨어러블 로봇에 의료보험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일본은 이미 작년 1월부터 이 토론을 시작했다. 코앞에 닥친 문제란 뜻이다. 인간 수명 100세 시대다. 곧 120세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수십 년을 아픈 다리로 살 수는 없다. 로봇 팔다리는 보통 사람의 필수품이 될 것이다. 새 시대를 준비하자. 참 MIT 공대도 보스턴 가까이에 있다고 한다. 보스턴은 이제 내겐 마라톤과 로봇의 도시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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