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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봄이 좋냐?

입력
2018.03.20 14:23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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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사랑하는 그대와 단둘이 손잡고/ 알 수 없는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그대여 그대여…’

‘꽃이 언제 피는지 그딴 게 뭐가 중요한데…/ 봄이 그렇게도 좋냐, 멍청이들아/ 벚꽃이 그렇게도 예쁘디, 바보들아/ 결국 꽃잎은 떨어지지…/ 몽땅 망해라 망해라…’

둘 중에 어느 노래가 요즘 젊은이들의 취향을 저격할까. 앞의 것은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2012년), 뒤의 것은 인디밴드 십센치(10㎝)의 ‘봄이 좋냐’(2016년) 가사의 한 부분이다. 봄바람 불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달달한 노래 ‘벚꽃 엔딩’은 ‘봄캐럴’이라 불린다. 그런 ‘벚꽃 엔딩’이 엔딩을 고한 건, 그 노래에 대한 청춘의 헌정을 조롱하듯 봄을 저주하는 발칙한 가사로 무장한 ‘봄이 좋냐’가 전파를 타면서부터다. 나오자마자 뮤직 차트를 올킬했다.

#2.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

지난해 8월 JTBC 리얼리티 프로그램 ‘한 끼 줍쇼’에 게스트로 출연한 이효리가 초등학생 소녀에게 던진 말이다. 강호동이 길에서 만난 아이에게 “어떤 사람이 될 거예요? 어른이 되면”이라고 묻자 이경규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거들었다. 그때 곁에 있던 그녀가 무심코 툭 던진 말이다. 이 한 마디는 즉각적으로 온라인을 평정했다. “역대급 카타르시스다. 눈물이 나게 좋다.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줬다” 같은 댓글이 넘쳐났다. 기성세대는 센 언니의 도발적 발설보다 그 열화 같은 반응에 크게 놀랐다.

#3. 햇볕을 받고 있는 맨홀 뚜껑, 빨래줄에 걸린 외할머니 옷, 접시에 가지런히 담긴 쌈채소, 전철 안 구석자리…. 페이스북 페이지 ‘무자극 컨텐츠 연구소’에 올라오는 사진들은 지극히 시시하고 평범하다. 설명은 딱 한 줄. 그런데 5만 명이 구독하며 힐링한다. 자극적 콘텐츠에 대한 반란이다. 매주 1회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사소한 인터뷰’. 사소한 사람들만 200명 넘게 인터뷰했다. 루저도 좋고 백수도 좋다. 팔로워만 1만 명이 넘는다.

#4. 이 두 어려운 용어를 안다면 당신은 아재가 아니다. ‘슬라임’, 일명 액체 괴물. 요즘 청춘의 장난감이다. 끈적이고 말랑한 점액질 형태다. ‘ASMR’. 우리말로 ‘자율감각 쾌락반응’. 연필을 깎고, 식빵을 찢고, 책장을 넘기고,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영상이 온라인에 넘쳐난다. 잘 된 건 수백 만 뷰가 기본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평범해지고 싶다. 남보다 앞서 아등바등 출세하려 하지도 않고, 그냥 내 처지와 기준에 맞게 보통스럽게 사는 데 만족하겠다고 한다. 봄이 왔다 해서 호들갑 떨 건 없잖아, 나홀로 빵지순례는 뭐가 어때서? 재벌 2세(알고 보니)와 신데렐라 이야기는 이제 그만 스톱! ‘혼술남녀’ ‘삼시세끼’ ‘윤식당’ ‘효리네 민박’의 짠내 나는 리얼리티가 더 가슴에 와 닿는 걸. 홍대앞, 가로수길? 성수동과 샤로수길의 소소한 풍경이 나는 더 좋다고.

‘노멀 크러시(normal crush, 평범함에의 동경)’라고 명명됐다. 2018년 최고의 히트작인 ‘소확행’ ‘워라밸’ ‘가심비’ ‘케렌시아’와 맥을 같이 한다. 안분지족(安分知足),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선비정신이 21세기에 불현듯 부활한 것일까. 그게 삶의 의미를 치열하게 고뇌하고 성찰한 끝의 깨달음이라면 좋겠다.

그런데, 마음 한편에서 짠하게 올라오는 이 감정은 무언가. 노~오력만으로 숟가락 색깔을 바꾸기 어렵고, 팍팍한 현실에 포기해야 할 게 N개가 넘다 보니, 젊음의 공식이 바뀐 것은 아닐까. 대책 없는 낭만파요, 무쇠도 녹일 용광로요, 질풍노도의 청춘인데…. 남도에서 무심히 벚꽃 소식이 올라온다.

한기봉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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