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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등록 : 2017.08.29 11:24
수정 : 2017.08.29 17:05

[이종필의 제5원소] 노아의 홍수에 빠진 청와대

등록 : 2017.08.29 11:24
수정 : 2017.08.29 17:05

지난 8월 21일에는 미 대륙을 가로지르는 일식이 있었다. 2분이 채 되지 않는 개기일식을 보기 위해 한국에서 약 200명의 과학 애호가들이 태평양을 건넜다.

미 서부 여행은 내게 처음이었다. 태양이 완전히 가려지는 경이로움이나 그랜드캐니언의 장엄함은 왜소하고 보잘것 없는 호모 사피엔스들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어떤 절대자가 있어 이 모든 것을 설계하고 확립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생길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인간 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연에 압도되지 않고 그 너머의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과학은 자연의 경외감이 주는 두려움을 뚫고 피워 낸 한 줄기 장미꽃이다.

눈앞에 펼쳐진 웅장한 그랜드캐니언 앞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걸 두고 노아의 홍수의 증거라고들 해요. 지구의 나이가 수 천 년밖에 안 되었다면서요.” 그 말을 하는 이도 듣는 이도 서로 웃어 넘겼다. 자연의 숭고함이 주는 경외감을 직접 느끼기 위해 이역만리까지 날아 온 평범한 생활인들은 과학자들보다 더 과학을 즐기는 듯했다. 전 세계 자연과학을 선도하는 이곳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에 반과학주의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다는 역설적인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그랜드캐니언에서의 웃음이 싹 사라지는 데에는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인천공항에 비행기가 내리자마자 노아의 홍수를 언급했던 그분이 전해준 고국의 첫 소식은 한국창조과학회 이사를 지낸 박성진 교수가 중소벤처기업부장관에 임명되었다는 뉴스였다. 청와대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거론하며 신앙은 검증의 대상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며칠 전 내가 본 대협곡은 불과 수 천 년 전의 대홍수로 1년 동안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이제 한국에서도 공공연하게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창조과학은 성경에 적힌 내용이 무오류의 과학적 사실이라고 여기며 기존의 과학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고, 지구의 나이는 45억년이 아니라 성경에 따라 6,000여년에 불과하다는 ‘젊은 지구론’을 펴고 있다. 창조과학은 기존의 과학적 성과를 인정하지 않고 성경의 문구들로 대체하려 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신앙이나 종교의 자유라 치부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이들은 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한 행동을 취하고 있다. 2012년 교과서에서 시조새를 삭제하라는 청원이 대표적이다. 종교 활동으로 신앙을 가지는 것과 종교와 신앙의 논리로 세상을 영위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군의 배후 조종에 의한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과연 공직에 앉힐 수 있을까. 적어도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에서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해당부서에서의 직무능력과는 무관하게 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용납할 수 없다. 아무리 실무에 유능한 사람이라도 5ㆍ18에 대해 이런 역사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장관직을 맡겨서는 안 된다. 확립된 사실을 부정하고 특정세력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논리를 옹호하는 사람이 공직에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권과 민주주의는 특정 부서에서만 필요로 하는 가치가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이 존립하기 위해서 정부의 공적인 영역이 항상 견지해야 할 토대이고 작동 원리여야 한다. 정부의 행정과 공권력의 행사를 통해 결과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과정의 순간마다 지켜져야 할 원칙이다. 한국식 민주주의를 한답시고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짓뭉갠 유신정권을 직무상의 유능함으로 변호해서야 되겠는가.

과학도 그러하다. 과학은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고 방법론이다. 창조과학이 과학이 아닌 이유는 그들의 주장이 틀렸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들의 주장에 이르는 길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기존 과학과 조금 다른 주장을 한다고 해서 장관직을 수행하지 못할 이유가 뭐냐는 변명이 성립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인사 난맥상이 드러날 때마다 나온 말이 “대체 불가능”이었다. 박성진 장관후보자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애초에 불가능하거나 잘못된 일일 가능성이 높다. 민주주의는 대체 불가능한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슈퍼 히어로들에 의해 굴러가는 체제가 아니다. 그런 체제는 오래가지 못한다. 해당 분야에서 평균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직무를 통해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체제가 바람직하다. 성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런 체제가 훨씬 더 오래 간다.

어느 모로 보나 청와대의 이번 인사와 해명은 설득력이 없다. 박기영 인사 파동을 겪은 게 엊그제인데, 이른바 ‘황금박쥐’ 뒤에 창조과학을 만나고 보니 문재인 정부의 과학에 대한 인식 자체가 너무나 저열한 게 아닌가 하는 절망감마저 몰려든다. 청와대를 상대로 21세기 대명천지에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 수준의 논의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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