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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의 나라

입력
2018.01.28 16:4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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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 38명 포함, 189명의 사상자가 난 밀양 세종병원 참사는 다시금 의무에 대한 생각을 일깨운다. 영문 모를 연기에 황망하게 오가는 간호사, 그로부터 30초도 안돼 응급실 내 폐쇄회로(CC)TV에는 가득 찬 연기로 인해 아무런 형체도 잡히지 않는다. 화재 후 긴급한 상황이 얼마나 빨리 전개됐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대부분 70대 이상 거동이 불편한 중증 고령환자가 숨졌고, 50대 후반 당직의사는 응급실이 있는 1층에서, 40대 후반 책임 간호사, 30대 간호조무사는 병실이 있는 2층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희생됐다. 희생된 의료진 3명은 화염과 유독가스 속에 환자 대피를 돕다가, 혹은 소화기를 들고 불을 끄다가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하고 연기 속에 쓰러졌다는 목격자 말이 들린다. 정확한 경위는 차후 밝혀지겠지만, 거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고령 환자들이 입원실에서, 중환자실에서 속절없이 누워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의료진은 유독가스 속에 애를 태우다 미처 빠져 나오지 못했을 터이다.

이 눈에 선한 그림에 다시 세월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가 기울어질 때 영문도 모르는 아이들과 함께 수장된 단원고 교사들. 아이들을 구하고, 빠져 나와야 할 시기를 놓쳐 끝내 아이들과 함께 했던 그 교사들 말이다. 황망하게 교사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아들아 장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대신했다. 수 많은 학생과 교사들을 보낸 교감 선생은 끝내 그 책임감, 죄책감을 안고 사고 이틀 뒤 세상을 떠났다.

직업적 의무를 다하는 과정에 희생마저 감수한, 혹은 어쩔 수 없이 희생된 이들을 대할 때마다 가슴이 저민다. 그 직업에 속한 사람들에겐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비단 그 직업인만 아니라 국민이 모두 평범한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지난해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태 이후 ‘이게 나라냐’는 말이 유행했다. 국정농단 대부분은 의무 없는 일을 강요하고, 이에 의무 없는 일을 한 사람들 때문에 일어났다.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기에 무수한 직권남용과 부조리의 세세한 면을 열거할 필요는 없겠다. 이 정부마저도 들어서자 마자 그런 일이 벌어졌다니 아연할 따름이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최근 뇌물과 횡령, 직권남용 등으로 불구속 기소된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임명된 지 두 달 만에 사실상 자신이 사유화한 e스포츠협회 관련 예산 20억원을 따기 위해 기획재정부 공무원에게 “십 원도 빼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본인이야 이런 저런 핑계를 대겠지만 권력의 힘이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기재부 공무원을 상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며, 관철시킬 수 있겠는가. ‘이게 나라냐’는 물음에 어깨를 짚고 정권을 잡은 이 정부가 권력 완장질이나 다름없는 이 사안을 반성하고, 내부 단속을 단단히 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개인의 일탈로만 여긴다면 5년 뒤가 걱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후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말을 수 차례 강조했다. 나라다운 나라는 의무 없는 일을 강요하는 사람, 이에 의무 없는 일을 하는 사람과 의무를 다하는 사람간의 무게 중심이 어느 쪽에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나라의 수준과 국민의 수준을 결정하기도 할 것이다. 희생된 의료진 유족은 27일 밀양 현장을 방문한 문 대통령에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었을 텐데 마지막까지 환자를 대피시키다 희생된 게 마음 아프다”며 “이 희생들을 국가가 잊지 말고 받들어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매뉴얼을, 시스템을 강화하고, 법을 엄히 한다고 해서 나라다운 나라, 안전한 대한민국이 될 일이었다면 벌써 되고도 남았다. 의무 없는 일을 강요하지 않으며, 의무를 다하는 이를 받들고, 존중하는 국가와 사회 풍토를 만드는 데서 나라다운 나라는 시작된다.

정진황 사회부장 jhch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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