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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영문 이름도 못 쓰는데 미분을 배워야 하나요

입력
2017.04.1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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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시즌 고교야구 첫 대회로 지난 1일 개막한 주말리그 경기.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제공
올 시즌 고교야구 첫 대회로 지난 1일 개막한 주말리그 경기.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제공

벌써 7년째를 맞은 고교야구 주말리그가 이달 개막했다. ‘공부하는 운동선수’ 육성을 표방한 주말리그는 2011년 정부 시책에 따라 학생 선수들의 학습권 보장과 수업 결손을 최소화한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과거 성적 지상주의에 발목 잡힌 한국 스포츠는 초등학생에서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학교 운동선수에게 ‘운동만 잘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주입했다. 학생의 본분인 학업은 뒷전이었고, 어려서부터 오직 운동에만 전념하는 직업 운동선수로 길들여지다 보니 프로 선수가 되지 못하면 사회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폐해를 없애고자 시작된 주말리그는 고등학교 운동선수들이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오전부터 오후까지 정규수업을 받고 난 뒤에 훈련을 하고, 경기는 주말에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일선 학교의 감독과 교사, 학부모들은 공부도, 운동도 모두 제대로 할 수 없는 환경이라고 입을 모은다.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에게 학습에 대한 동기 부여가 전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기초 교육이 이뤄지지 않은 학생 선수들에게 느닷없이 미분과 적분을 가르치는 식이다.

이런 와중에 올해부터 학생 선수들의 기초 학력 검증 절차는 더 강화됐다. 최근 한국대학스포츠총장협의회(KUSF)가 올해부터 지난해 1,2학기 평균 학업성적이 C가 되지 않는 선수들에게 협의회가 운영하는 농구, 축구, 배구, 핸드볼 등 4개 종목 출전을 불허했고, 실제로 일부 선수들이 이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출전길이 막히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정유라 사태’가 결정타였다.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와 조카 장시호씨의 학사 비리가 터져나오면서 교육당국과 대학, 체육계가 체육 특기자에 대한 학사 관리 정상화를 통한 ‘공부하는 학생 운동선수 육성’의 명분에 힘이 실린 것이다. 또 교육부가 지난달 29일 발표한 17개 대학의 ‘체육 특기자 학사관리 실태 조사결과’에 따르면 332명의 특기생과 교수 448명이 부당한 방법으로 학점을 취득하거나 준 것으로 적발된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과 더불어 올해부터는 학교체육진흥법에 따라 초ㆍ중ㆍ고에서도 운동선수에 최저학력제가 도입됐다.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선수는 운동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나마 초등학교와 중학교로 확대돼 연착륙 조짐을 보이던 주말리그에 타격을 입혔다. 김영직 포철고 야구부 감독은 “작년만 해도 요리나 승마 등 운동선수들을 위한 맞춤형 교양 수업이 있었는데 올해 다시 폐지됐다”면서 “김연아 선수나 박지성 선수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것을 봤다면, 그들이 훗날 메이저리거가 됐을 때 필요한 전문 교육이 뭔지 모두가 공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도 설악고 야구부 감독은 “알파벳이나 한자로 자기 이름도 못 쓰는데 무슨 수업이 머리 속에 들어오겠느냐”고 지적했다.

고등학생 선수들이 수업을 모두 마치면 보통 오후 4시50분, 야간훈련을 끝내면 밤 9시30분이다. 이튿날 오전 7시에 등교한다. 학생들의 지친 심신은 방과 후 훈련에 지장을 주고, 다음날 수업 시간에는 다시 꾸벅꾸벅 졸고 앉아 있는 악순환의 반복이다. ‘강제 학습’에 찌든 선수들의 경기력은 저하되고 최저학력 기준에는 미달되다 보니 진학문, 취업문은 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종도 감독은 “학습을 병행해야 하는 일주일 동안 선수들의 컨디션이 좋을 리 없다. 우수 선수는 나올 수 없는 환경”이라고 지적했다. 그나마 기량이 좋은 선수만 주말마다 등판시키다 보니 투수들의 혹사 문제도 불거진다.

장채근 홍익대 야구부 감독은 “주말리그 시행 이후 기량이 우수한 선수는 급격히 줄었는데 하물며 학력 기준까지 적용하면 대학에 진학할 선수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학생 선수들이 공부를 병행하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무조건적 최저학력제 도입에 따른 양면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선 현장의 지도자들은 운동선수들의 학업 병행에 대해 공감을 하면서도 일반 학생들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할 것이 아니라 운동선수에게 기초 소양으로 필요한 교육과정 프로그램의 도입과 학업시간 분배 등 융통성 있는 시책을 줄기차게 촉구하고 있다. 운동하는 학생들에게 ‘국ㆍ영ㆍ수 중심의 교과 성적’이라는 기준을 내민다면 교과 성적 때문에 또 다른 사회적 열등생으로 내몰릴 수 있다. 운동을 중도 포기한 그들에게도 재취업의 문을 열어 주려면 학력 위주의 사회 풍토를 바꾸는 것이 먼저다.

성환희 스포츠부 기자 hhs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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