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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술집 ‘소설’과 작은 이야기

입력
2017.03.0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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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다. 매화나무에는 꽃망울이 차오르고 있다. 봄기운이 반가운 한편으로 ‘벌써’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나라 전체로는 중대한 변화를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고 우리 스스로의 선택과 참여를 포함하는 그 변화의 향방은 개개인의 삶에도 적지 않은 파동을 쟁이게 될 것이다. 그러거나 일상의 시간은 가뭇없이 넘어간다. 그 와중에 서른 즈음부터 드나들던 오래된 단골 술집 한 곳이 문을 닫기도 했다. ‘소설.’

왁자한 종업식이 끝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건만 이사를 앞둔 어제도 아쉬움이 남은 몇몇이 ‘소설’의 목로를 채우고 있었다. 주인장 염기정 누이의 마음이 밟히기도 했으리라. 빈 테이블이 유난히 휑했다. 90년대 심야영업 단속 시절을 지나며 달게 된 ‘전과 11범’(‘식품위생법 위반’이라는데, 음식에 대한 존중심을 갖고 있는 누이로서는 이 대목이 영 마뜩잖은 듯했다)

이야기서껀 30년 세월이 남긴 잊기 힘든 일들이 조근조근 흘러나왔다. 영업정지를 당한 뒤 라면 박스를 머리에 이고 함께 경찰서를 찾아가준 정 많고 넉살 좋은 단골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 성공한 이야기 안에서 장차의 유명 영화제작자는 부인을 고생시키는 못난 남편 역할을 자임했고 진심이 담긴 연기는 훈계와 성의의 조용한 수용이라는 담당 경찰분의 자연스런 리액션까지 끌어낸 모양이었다. 5년 뒤 우연히 만난 그 경찰분이 반갑게 남편 잘 계시냐고 인사를 해오지만 않았다면 있지도 않는 남편을 기억에서 찾아내느라 스스로를 의심할 일까지는 없었을 테다. ‘한 번 더 걸리면 끝’이라는 으름장이 정말 심상찮게 들릴 때가 왜 없었으랴. 그런데 바로 며칠 뒤 ‘심야영업 단속’ 시대가 막을 내림으로써 술집 ‘소설’의 이야기는 또 계속된다. 이렇게 개인의 이야기는 시대와 만나고 역사가 된다.

아직까지 이야기의 주인공이 미지의 인물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세브란스 영안실 맞은편 ‘볼쇼이’ 시절, 저녁 느지막이 2층 가게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작은 창이 열려 있고 밖으로 등산용 자일이 내려져 있었다. 화장실에는 무언가가 얼어붙어 있고 말이다. 도둑이 들었나 했지만 없어진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이틀 뒤 석유집 아저씨가 배달 온 기름을 붓다 말고 “왜 사람을 가두어두고 그래요” 하면서 생뚱맞은 표정을 짓기 전까지는 그냥 지나간 일이 되었다. 그제 앞을 지나는데 누가 2층 창밖으로 만 원을 흔들며 자기 좀 꺼내달라고 했다나. 전화요금이 체납되어 가게 안의 전화도 불통인 때였다. “내가 저 집 사장을 좀 아는데, 저렇게 가두어두었을 때는 그럴 만해서 그랬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지나쳐 갔다는 이야기. 대개 한두 번 이상은 들은 이야기지만 목로의 청자들은 마치 처음인 듯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이는 누구일까. 술에 취해 구석에서 쓰러져 자다가 갇혀버린 그이는. 소심해서 그 허술한 가게문을 부서뜨릴 생각도 못한 그이는. 얼어붙은 용변의 주인공은. 등산은 좀 했는지도 모르겠다. 화장실 습관을 떠올리면서까지 몇몇 이름이 거명되었지만 주인공은 어디 있는지 말이 없었다. 그렇게 어떤 이야기는 미지와 공백을 안으며 작은 전설이 되기도 한다.

누가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수없이 들은 노래지만 조금 더 떨리고 낮게 흐르는 듯했다. 주인장도 이어받았다. “사랑이란 즐겁게 왔다가 슬프게 가는 것/ 훌라춤에 흥겹던 기쁨도/ 모래알에 새겨진 사연도/ 파도에 부서지는 이 순간……” 영화평론가 허문영이 “다른 데서 접하기 힘든 온화하고도 구슬픈 습기가 있다”고 한 그 목소리. 바로 그의 기타 반주였고 시계는 다시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피곤이 엄습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유난히 길고 멀었다. 이런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 가운데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또 봄을 맞는다. ‘소설’은 말 그대로 ‘작은 이야기’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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