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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치르겠다 싶은 뙤약볕 농사일... 귀농, 아무 생각 없어야 산다

입력
2016.08.1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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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첫해만큼 뜨거운 더위

호미 던져 두고 농막으로 피신

선풍기 돌려도 온풍만 끈적끈적

하릴없이 앉아 회고록 절로

“나아질 기미 없는 농사일이지만

어디나 살려고 애쓰긴 마찬가지

金 아닌 7, 8위전 이겨도 좋겠다”

필자가 고추밭에서 붉은 고추를 따고 있다. 한 낮이지만 달려드는 모기와 햇볕을 차단하기 위해 그물망사로 된 옷과 얼굴을 가리는 모자를 쓰고 작업을 해야 한다.
필자가 고추밭에서 붉은 고추를 따고 있다. 한 낮이지만 달려드는 모기와 햇볕을 차단하기 위해 그물망사로 된 옷과 얼굴을 가리는 모자를 쓰고 작업을 해야 한다.

눈 앞이 하얗게 흐려졌다. 후끈한 공기가 살갗을 뚫으려고 애쓰는 사이 안경은 순식간에 간유리처럼 뿌옇게 변했다. 아랫배 쪽 옷자락을 올려 안경 렌즈를 닦아 보지만 내내 뿌옇다. 그러고 서 있는 사이 10초 만에 몸은 이전보다 더 뜨겁게 달았다. 임시방편도 안 된다. 어쩌면 역효과만 남는 ‘저장고 피서’의 후유증이다.

농업용 저온저장고는 영상 1도 정도로 온도를 맞춰 놔서 그냥 냉장고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안에 들어가서 30초 이상 견디기도 힘들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면 더 힘들다. 뻔히 더 힘들 걸 알면서 미련하게 자꾸 기어들어가게 된다.

오늘도 고구마밭 고랑 잡초를 해치우려고 덤볐다가 얼마 전진하지도 못하고 주저앉았다. 어깨높이까지 올라오는 고구마순 사이로 풀을 찾아 뽑고 베고 하다 보니 그냥 고랑에 눕고 싶었다. 누울까 말까 고민하다가 뙤약볕에 일 치르겠다 싶어 저장고로 향했다. 문을 열며 맞이하는 어둡고 서늘한 공기는 사이다처럼 짜릿했고, ‘이러다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훅 날아갔다. 불과 몇 초 후 다시 만날 불꽃 더위의 복수는 그 때 가서 당하면 그만이다. 아무 생각 없어야 산다.

일단 농막으로 피신처를 옮겼다. 선풍기를 세게 돌렸지만 날개 뒤에서 누가 몰래 빨래를 삶는지, 끈적한 온풍만 쏟아냈다. 급하게 웃통을 벗고 몸에 물을 묻혔다. 선풍기 앞에 바짝 서서 물기를 말리니 그나마 시원했다. 가슴과 배를 손으로 문지르며 시선을 내리니 삼각산이 우뚝하다. 복부는 그렇다 치고 흉부는 왜 더 튀어나와 보이는 건지. 갱년기인가? 여성호르몬이 막 나오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요 며칠 TV 프로마다 부쩍 슬퍼진 걸 보면 받아들여야 할 것 같기도 하다.

라디오에서는 24절기 학습하는 모양이다. “이제 입추도 지났고 조금 있으면 모기도 입이 돌아간다는 처서가 오니 시원해지겠죠?” 확 입을 돌려버리고 싶었다. “내친 김에 겨울 음악을 들어볼까요? 캐롤을 두 곡을 시원하게 들려드립니다~.” 정말 시원하게 한 방 돌려버리고 싶었다.

하긴, 여유 있는 사람들은 더위를 실감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 집에서 냉방기 틀고 쾌적하게 있다가, 찬바람 나오는 승용차로 출근하고, 약간 서늘하다 싶은 사무실에서 일 보다가, 시원하게 맥주 한 잔 하고 들어가면 뭐이 힘들겠나. 어렵게 장만한 에어컨, 겨우내 분홍 레이스 달린 덮개로 먼지 하나 안 닿게 모시다가, 여름에는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아 바라만 보는 사람들과 다르겠지. 더우니까 삐딱해진다.

이런 더위가 반백 생전에 두어 번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살다가 커다란 변화가 생긴 여름마다 많이 뜨거웠다. 1994년 사회인으로서 첫 여름이 그랬고, 딱 5년 전 8월 피난 가듯 짐 싸서 내려와 괭이질 시작할 때도 무지하게 더웠다. ‘첫 시골 생활이라 이렇게 힘든 건가’ 할 때쯤 동네 어르신들은 “아이고호~ 죽겄구마. 이런 여름 생전 처음이라” 하셨다. 인생 전후반 시작하는 해는 여지 없이 ‘몇 십 년 만의 더위’ 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러면 올해는? 벌써 인생 연장전 시작한 건가?

엎어진 김에 쉬어 가고, 앉은 김에 싸고 가자. 약간 식은 체온에 감사하며 농막에 앉아 5년을 돌아본다. 노트에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왜 농사? 오직 농사? 앞으로도 농사?.” 꽤나 일 하기 싫은 모양이다. 이젠 농사에 대고 시비다. 싫은 이유부터 시작하다 보니 괜찮은 이유도 꽤 있다.

가뭄과 볕에 어려워하는 들깨 모종은 제때 살펴줘야 한다.
가뭄과 볕에 어려워하는 들깨 모종은 제때 살펴줘야 한다.

“힘들다”

더 이상 표현이 안 된다. 정말 힘들다. 20년 가까이 몸담은 직장 생활이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비교해보니 편하게 일하며 살았다.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서 신문지 덮고 잠들고, 요즘처럼 뜨거운 날 아스팔트에 엎드리고 뒹굴기도 했지만 가끔 있는 일이다. 운전기사가 취재현장에 데려다 주는 사이 틈틈이 낮잠도 자고 낮술도 하다가 하루 종일 키보드만 지압해주고 퇴근한 적도 많았다.

서투른 손 탓에 남들은 농한기라고 하는 때에도 밭고랑에 들어가야 하고, 나도 감당 못하는 내 고집에 논은 풀로 가득하다. 비 오는 날이 쉬는 날이라건만, 왜 요즘엔 비가 와도 저녁에야 오는 지 모르겠다. 여름 긴 소매는 부의 상징이라는데 나는 우람한 팔뚝에 쿨토시 끼우기 힘들어 365일 긴 팔 셔츠만 입고, 땀띠는 이 참에 사타구니에다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여름이면 미치겠다. 솔직히 말하면 미치고 싶은 사시사철이다.

“수지가 안 맞는다”

5년이면 어느 정도 될 줄 알았다. 삼 세 번도 한참 지났으니 일머리도 생기고 잔근육도 붙어서 어엿한 농부의 향기를 풍기리라 생각했다. 천만의 말씀이다. 호미질은 아직도 서툴러 가끔은 맨손이 편하고, 수확량은 첫 해보다 나아지질 않는다. 농부라면, 적어도 수입의 50퍼센트는 농사로 채워야 정체성이 인정된다고 생각했다. 다행인지 근근이 비율은 맞춰 왔고, 불행인지 총수입은 많지 않기에 가능했다.

굳이 비율을 맞출 생각은 없다. 국세청에서 정한 것도 아니고, 농사 수입이 모자란다고 내가 변하는 것도 아니다. 이일 저일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그 덕에 먹고 살면 그만이다. 헌데, 누구에게나 그 ‘먹고 살면’이 쉽지 않으니 문제다. 특히 농사로 먹고 살겠다고 작심한 마당에 아직도 들어오고 나가는 게 비슷하다. 누가 수입을 물어보면 순수익이 아니라 총액을 얘기해서 헷갈리게 하는 버릇을 못 버리고 있다.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농사로 돈 벌 생각은 없었다. 현상유지만 하면 바랄 것 없다고 생각했다. 내려와 보니 실제로 그랬다. 주변에 농사 지어서 부자된 사람 없다. 농사 규모가 크고 기계도 크고 차도 큰 놈으로 가진 사람은 있지만 알고 보면 땅도 남의 땅이요 나머지는 거의 빚 덩어리다. “조수익”이라고 말하는 총수입만 클 뿐, 손 안에 떨어지는 알맹이는 얼마 안 된다.

나아지진 않아도 까먹지는 말아야 하는데 맘 같지 않다. 농사라는 것이 예로부터 나라와 호흡이 맞아 돌아가야 하는 것인데, 이제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허울뿐인 구호도 찾아 보기 힘들다. 아들놈 선재도 처음 듣는단다. 농사가 천하의 근본이니 그렇게 중요한 건 대기업이나 외국 기업에 맡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지 모르겠다. 영 전망이 없다.

“친구들이 보고 싶을 때는 보고 싶어하고 만다”

습관이라는 게 무서워서 가끔 술 한 잔 하다 보면, 앞 자리에 자주 앉았던 친구들이 아른거린다. “남자는 여자하고 달라. 친구라는 게 맨날 통화하고 얼굴 보고 연애하듯이 해야 속이 풀리는 여자하고 달라서, 그냥 잘 있겠거니 생각하다가 1년에 한 번 만나도 자연스러운 게 친구라구.”

아내에게 일장 연설을 했고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리울 때가 있으니 그래서 친구다. 버스타면 3시간 만에 강남에 도착하고, 올라오면 재워준다는 사람들 많은데 왜 그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어느새 일에 치이고 눌려 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니 그럴까. 여유는 생기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라고 했거늘, 마음의 여유 마저 줄어든 것 같아 겁난다.

사람들한테 이렇게 말하면 내내 고생만 하면서 사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어떻게 힘들게만 살겠나. 지 혼자 좋아서 키득대며 좋아할 일도 있고, 적절하게 타협하면서 대강 살만 하니까 사는 거겠지.

지난 8일 용방면 한 비닐하우스의 연료탱크가 폭발하면서 기름이 농로로 흘러 불이 붙은채로 흘러가고 있는 것을 소방관이 진화작업하고 있다. 농민들은 기름이 논으로 흘러들어가면 벼가 말라 죽는다며 걱정했다.
지난 8일 용방면 한 비닐하우스의 연료탱크가 폭발하면서 기름이 농로로 흘러 불이 붙은채로 흘러가고 있는 것을 소방관이 진화작업하고 있다. 농민들은 기름이 논으로 흘러들어가면 벼가 말라 죽는다며 걱정했다.

“못해도 뭐라고 하는 사람 없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말 싸움할 때 가장 이기기 힘들고 대책 없는 애들이 내 뱉는 단골메뉴가 “내 맘이야. 어쩔래!” 였다. 그 말을 들으면 돌아서거나 패주거나 둘 중의 하나. 그 말을 내가 하고 산다. 내가 회장이고 사장이고 전략기획본부장이다. 물론 내 명의의 땅이 아닌 경우에는 농장장까지 내려간다. 어쨌든 내 맘이다.

간전댁할머니가 생산이사로 계시고 오봉댁어머니가 총괄자문을 해 주시고 장씨아저씨의 현장감독이 있어야 하지만 그래도 결정은 내가 한다. 그리고 비참한 결과가 나오면 그 어르신들의 말씀은 항상 비슷하다. “애쓰셨네요” “어쨌든 애썼구마” 중독성과 환각효과가 강해서 그 말씀을 못 들으면 매우 서운하게 되고, 듣고 나면 형편 없는 농사 결과에 만족하게 된다.

“괴롭히는 사람 없고, 괴롭히지 않아도 된다”

딱히 누구를 괴롭히거나 당해 본 경험은 없다. 아이들과 많이 싸워본 적도 없지만 나를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다. 싸움실력보다는 외모 덕을 많이 본 편이다. 어쨌든 그런 육체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말하는 건 아니다. 그저 관계에 의해 의도적이지 않아도 그 사람이 맡은 일 때문에 누구와 누구는 괴로움을 주고 받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된다. 흔히 ‘갑과 을’일 때가 있고 ‘상사와 부하’일 때도 있다. 그냥 그게 싫었다.

어떻게 얼만큼인지 계량할 수 없지만 고마운 사람들이 많고, 고맙다는 사람도 많아졌다. 이전과 똑같이 의도한 바는 없다.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인데 그 일 때문에 누군가에게 감사할 줄 알고, 나도 터무니 없이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살 수 있으니 감사하다.

“이렇게 가면 되겠다”

‘이러다간 머지 않아 작살 나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회사에선 월급을 반 토막 내고, 그 나마 나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 시절이 있다. 혹시라도 ‘투자’라는 용기를 냈던 사람들은 치도곤을 맞았고, 통장을 핥고 지나가는 숫자들과 그 숫자를 이끄는 마이너스 기치를 조신하게 감당했기에 이나마 버텼는지 모르겠다.

꿈틀거리면 안 되는 세상이다. 적어도 산업은행 정도가 받쳐주지 않으면 그냥 사는 대로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마땅하다. 그런 면에서 농사는 괜찮은 점수를 줄 만 하다. 일단 먹고 사는 문제의 절반 이상은 해결된다. 나머지는 안 쓰고 덜 먹으면 된다. 덜 먹어야 하는 대상이 술과 고기라는 점에 타격이 크겠지만 이미 남들 먹을 만큼 먹었다고 생각할란다.

어디든 사는 게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 사람덜 햄버거 하나 묵을라고 땡볕에 4시간씩 섰다는 거 들으니 참 딱헙디다” 하던 S동생 말마따나 도농과 사농공상이 애쓰고 살기는 마찬가지다. 덜 애써도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며칠 전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친구가 환호하는 모습을 봤다. ‘나는 살다가 저렇게 기뻐할 일이 있었나’ 생각하다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리 좋아할까’ 싶어 짠했다. 나는 그저 7-8위전에서 이기면 좋겠다 정도로 살고 싶다.

집 현관문을 열 때까지 따귀가 얼얼했다. 농장을 나설 때, 귓가에서 앵앵대는 모기를 때려 잡는다는 게 힘 조절을 잘 못했나 보다. 제 뺨 제가 때리고 살아도 견디면 그만이다. 볼을 감싸고 마루에 들어섰다. 아내는 주방 팬 돌아가는 소리에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선재는 제 방에서 음악을 듣는지 휘파람을 분다. 선재의 소리를 들으며 주방을 향해 한참 서 있었다.

딱 이 정도! 아무 생각 없다. 감사할 뿐이다.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고랑의 풀 속에서 용케 잘 자라던 고구마순이 가뭄과 뜨거운 볕에 시들해졌다.
고랑의 풀 속에서 용케 잘 자라던 고구마순이 가뭄과 뜨거운 볕에 시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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