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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흩어지는 시간과 얼어붙은 시간 사이에서

입력
2017.09.0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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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알래스카 인근 유콘 강가에서 한 채굴꾼이 사금 채취에 성공한다.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1925)의 배경을 이룬 클론다이크가 바로 강 건너에 있었다. 캐나다 북서부의 오지 마을이 골드러시의 역사 속으로 진입하는 순간이었다. 미국 서부 해안에서 긴 항해를 한 뒤에도 설산을 넘어가야 하는 머나먼 험로였지만 꿈을 품은 사람들의 행렬은 이어졌다. 많은 이들이 눈사태나 동상, 굶주림으로 죽음을 맞았고, 꿈을 접고 돌아가야 했다. 엘도라도에 도착한 사람도 많았다. 강가의 작은 마을은 몰려든 채굴꾼과 그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이들로 성시를 이루었다. 캐나다 유콘 준주 도슨 시티의 탄생사다.

올해 EBS국제다큐영화제에서 접한 빌 모리슨 감독의 ‘도슨 시티- 얼어붙은 시간’(2016)은 그 도슨 시티의 역사가 잃어버린 무성영화의 역사와 뜻밖의 자리에서 만나는 이야기다. 도슨 시티가 흥성하던 20세기 초반은 뤼미에르 형제가 만들어낸 시네마토그라프라는 기계가 대중들에게 또 다른 꿈의 시간을 선사하며 산업적으로 성장하던 때였다. 도슨 시티의 극장 역시 성황이었다. 무성영화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영화는 개봉한 지 3년 뒤에나 볼 수 있었다. 머나먼 땅 도슨 시티에는 돌고 돈 필름이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흥미로운 것은 배급업자들이 필름의 회수를 꺼렸다는 사실이다. 거리와 비용 때문이었다. 많은 필름들이 그대로 남았다. 셀룰로이드 필름은 높은 가연성 때문에 종종 화재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도서관, 체육관 등지가 넘쳐나는 필름의 보관처가 되었고, 많은 필름이 강에 버려지고 불태워졌다. 유성영화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하면서 무성영화 필름은 더더욱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체육관의 수영장이 아이스하키 링크로 개조될 때 많은 필름들이 흙과 함께 수영장을 메우는 데 쓰였다. 무성영화 필름들이 동토의 땅에 ‘얼어붙게’ 된 경위다. 1976년 우연히 그 자리에 현대식 극장을 짓는 과정에서 얼어붙은 필름들이 세상으로 올라왔다. 필름 상자로는 500여 개, 작품으로는 300여 편이었다.

이 다큐의 어떤 점이 나를 매혹했던 걸까. 심하게 훼손된 탓에 불속에서 타고 있는 것처럼 직직거리며 재생되던 무성영화 영상의 그 이상한 아름다움이었을까. 벤야민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들은 망각 속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과거의 섬광 같기도 했다. 무성영화의 복원된 푸티지들은 도슨 시티의 역사와 무성영화의 역사를 얼마간 지시하고 발화하는 방식으로 편집되어 있었는데, 이야기의 뒤에 머물려는 다큐의 조심스러움도 좋았지 싶다. 생각해본다. 얼어붙은 시간의 봉인과 해제에 자기도 모르게 참여한 사람들을. 금을 찾아 오지의 강가를 헤매는 채굴꾼, 도착한 이들과 도착하지 못한 더 많은 이들, 골드러시가 만든 도시의 성쇠와 운명을 나눈 사람들, 영화의 시대의 도래와 배급망의 끝에 놓인 어떤 도시, 극장과 배급업자의 이해, 버려진 무수한 필름들, 아이스하키를 좋아한 주민들과 수영장을 메우는 공사장 인부들의 무심한 삽, 빙판 위로 솟아나는 필름 자락과 놀던 아이들, 수십 년 뒤 우연히 그곳을 파내는 포클레인. 여기에는 먼 훗날 필름의 발굴과 같은 목표 지점은 당연히 없다. 캐어내야 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범용한 삶의 시간들. 그러면서 그것들은 더 많은 우연, 의지와 노력의 개입, 시간의 무심한 흐름과 함께 역사가 된다. 기억할 만한 의미의 층도 생겨난다. 대개는 한참 나중의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착잡한 이야기만은 아닐 테다. 우리가 사는 오늘이 많은 부분 역사의 표층에서 흩어지는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은 동시에 역사에 대한 무성(無聲)과 익명의 무수한 참여를 잊지 않는 일이기도 하겠기 때문이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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