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황영식
주필

등록 : 2017.11.09 17:49
수정 : 2017.11.09 18:11

[황영식의 세상만사] 힘내라, 낭만검객(劍客) 유승민!

등록 : 2017.11.09 17:49
수정 : 2017.11.09 18:11

정치현실이 대의(大義)에 등 돌려도

시대정신 비켜간 현실 꼭 바로잡혀

새 정치지형 열리기까지 꾹 참아야

단풍철이 끝났다지만, 야트막한 야산 옆 우리 아파트단지는 아니다. 아침마다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등산로 입구의 단풍은 이제 막 절정이다.

잣나무 숲에 점처럼 박히거나 노란 이팝나무와 은행나무를 배경 삼아 부조(浮彫)로 뜬 단풍나무가 타는 듯 붉다. 계절 변화에 무감해진 지 오래인 사람까지 가을 낭만에 적시고 남는다.

그러나 집을 나서면, 세상은 찬바람이 매섭다. 정치판은 초겨울 숲처럼 을씨년스럽다. 바른정당에서 이탈한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등 의원 8명의 자유한국당 복귀를 지켜보자니 더욱 그렇다.

이들의 이탈 사유는 뻔하다. 내년 6월의 지방선거를 ‘4당 체제’로 치르다가는 단체장이건 지방의원이건 당선자 내기가 쉽지 않다. 그 결과 지역구의 조직과 지지세가 무너져 2020년 총선에서 자신의 정치생명도 끝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이들의 한국당 복귀는 어떻게든 목숨을 이어가려는 발버둥이다.

그런데 이들의 정치셈법은 정확할까. 박근혜 탄핵과 5ㆍ9 대선 이후 민심은 문재인 대통령 지지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 결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도 안정적 지지도 1위 정당에 올랐다. 특히 70%를 넘나드는 문 대통령 지지율은 대선 득표율(41.1%)에 비해 크게 높다. 반면 한국당 지지율은 홍준표 대표의 대선 득표율(24%)에 크게 못 미치고, 때로는 한 자릿수로 내려가기도 한다. 탄핵 이후 보수 민심이 갈 곳을 잃은 데 그치지 않고, 크게 변질ㆍ분화했음을 일러준다. 그래서 ‘보수결집’ 효과를 집어넣은 전통적 셈법이 의심스럽다.

물론 내년 지방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전국적 지지율이 아니라 보수 본거지인 대구ㆍ경북(TK) 지역 지지율이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실제로 TK지역에서 한국당은 민주당에 내주었던 지지율 1위 자리를 되찾은 지 오래다. TK 민심이 부산ㆍ경남(PK)과 수도권 등지로 이내 파급된 경험에 비추어 바른정당 탈당파의 주력인 비(非) TK 출신들의 셈법 또한 맞을 수 있다. 고질적 ‘지역정서’가 온존하고, 앞으로 더욱 기승을 부릴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그러나 이들의 셈법은 허점이 많다. 정치상황이 보수결집을 자극하면 방황하던 보수세력이 어쩔 수 없이 뭉치리란 예상부터 미덥지 않다. 탄핵 이후 보수세력의 분화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수준이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TK 변두리 지역인 고향의 친구들만 봐도 저마다의 지지성향을 굳혀가고 있다. 적어도 한국당 지지로 되돌아설 가능성은 절반도 안 된다. 60대에 접어든 이들이 그럴진대, 20~40대야 말할 것도 없다. “보수가 무조건 뭉쳐야 한다는 민심에 따랐다”는 9일 김 전 대표의 말이 군색한 변명으로 들린 이유다.

무엇보다 유승민의 선택을 계산에서 빠뜨린 것은 큰 오류다. 그는 2015년 국회법 개정안 파동에서 지난해 총선과 탄핵정국에 이르기까지 ‘박근혜당’의 동요를 부른 주인공이다. 그는 그때마다 ‘보수혁신’의 대의(大義)를 내세웠고, 아직 이를 버리지 않았다. 경제는 ‘따뜻한 보수’로 ‘차가운 시장주의’와, 안보는 ‘빈틈없는 대북 억지’로 어정쩡한 햇볕ㆍ달빛과 선을 그었다. 당장 좌우 어느 쪽으로부터도 적극적 지지를 받지 못해 바른정당이 반쪽 났다. 그래도 여전히 그에게 있는 대의를 이탈파는 외면했다.

단순히 눈앞의 현실에만 비추면 그는 옛 무협영화에 자주 나온, 날카롭게 칼을 벼리고도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살의(殺意)가 녹아 나간 ‘낭만검객(劍客)’의 모습이다.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경계해 마지않은, ‘책임의식 없는 열정’ 내지 ‘지적 낭만주의’에 가깝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의 정치적 낭만을 탓할 수 없다. 멀리 갈 것도 없다. 1970ㆍ80년대의 운동권은 사회현실에 매몰되지 않음으로써 민주화를 이루었다. 그 많다던 보수세력이 사라질 이유도 없어, 그의 꿈도 언젠가 현실이 될 수 있다. 다가오는 겨울은 춥겠지만, 잘 참고 견디길 바란다. 봄을 재촉할 중도보수세력의 자각도 함께다.

주필 ysh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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