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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밀림 속 오솔길 따라 잠시 속세를 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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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밀림 속 오솔길 따라 잠시 속세를 잊다

입력
2018.04.03 18:0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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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철마면 아홉산숲의 평지대밭은 초록 그늘이 신비로움을 더해 여러 편의 영화에 등장했다. 부산=최흥수기자
기장 철마면 아홉산숲의 평지대밭은 초록 그늘이 신비로움을 더해 여러 편의 영화에 등장했다. 부산=최흥수기자

부산의 모든 것은 바다로 향한다. 바다는 외지인이 부산을 찾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부산은 산이다. 벽과 벽을 맞댄 민가들이 산중턱까지 터를 잡았고, 산자락을 연결한 산복도로가 부산을 대표하는 풍경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산복도로에서도 최종적으로 눈길을 잡는 것은 결국 바다다. 그런 부산에도 바다에 뒤지지 않는 멋진 숲이 있다. 설레고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힐링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오래된 숲이다.

능선도 아홉 계곡도 아홉, 400년 아홉산숲

“여기 부산 기장 철마면 아홉산 자락에 한 집안에서 400년 가까이 가꾸고 지켜 온 숲이 있습니다.” ‘아홉산숲’ 안내책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400년 가꾸고 지켜 왔다는 자랑에서 방점은 ‘지켜 왔다’에 찍힌다. 아홉산숲은 가지런하고 정돈된 것에 익숙한 인간의 시선을 특별히 배려하지 않았다. 아기자기게 잘 다듬은 정원과는 거리가 멀다. 편히 쉬어갈 수 있는 시설도 부족하고, 관람객을 위한 식당이나 매점도 없다.

흐드러진 목련이 아홉산숲 입구에서 관람객을 반긴다.
흐드러진 목련이 아홉산숲 입구에서 관람객을 반긴다.
아홉산숲은 숲 안에서는 확인이 불가능한 능선과 계곡의 숫자에서 따온 이름이다.
아홉산숲은 숲 안에서는 확인이 불가능한 능선과 계곡의 숫자에서 따온 이름이다.
숲 초입의 ‘관미헌’은 ‘고사리(하찮은 풀)도 눈 여겨 본다’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숲 초입의 ‘관미헌’은 ‘고사리(하찮은 풀)도 눈 여겨 본다’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관미헌 앞 구갑죽. 대 마디가 거북 등 문양이다.
관미헌 앞 구갑죽. 대 마디가 거북 등 문양이다.

전체 숲(52만㎡)의 5분의 3이 편백나무 삼나무 은행나무 리기다소나무 상수리 밤나무 등 인공림이지만 최대한 자연에 가깝게 관리하고 있다. 금강소나무 참나무 산벚나무 층층나무 아카시 등 자생하는 나무와 어우러져 있어서 인공림인지 천연림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아홉산숲에선 본래의 주인들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자리를 꿰차고 있다. “산토끼 고라니 꿩 멧비둘기들이 우거진 숲과 대밭에 둥지를 틀고, 족제비 오소리 반딧불이도 온갖 이끼와 버섯과 이웃하며” 살고 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솔바람과 대숲 바람에는 온갖 새들의 지저귐이 섞여 있다. 2001~2002년 생태환경조사에서 아홉산숲에 깃들어 사는 동식물 종류는 주왕산 국립공원과 비슷한 것으로 파악됐다. 철마면 웅천리 일대가 1971년 그린벨트로 묶이고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것도 숲을 지킬 수 있는 요인이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건강한 자연을 보존하려는 산주의 굳건한 의지였다.

아홉산숲은 한 집안의 고집으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역사의 큰 고비를 넘기면서도 자자손손 이어지고 있다. 숲의 역사는 1600년대 남평문씨 일족이 웅천 미동마을(곰내 고사리밭)에 정착하며 시작됐다. 해방 직후에는 구역을 나눠 은행나무 삼나무 참나무 등을 심고 민간 최초로 숲 가꾸기를 위한 자체 임도를 개설했다. 문씨 집안이 잡은 이래 7대 후손인 의순씨는 국ㆍ도유림 관리자로 위촉돼 편백나무를 심었고, 자영 독림가로 지정된 8대 동길씨는 잣나무 숲을 더했다. 이렇게 대를 이어가며 세월과 정성을 보탠 결과, 아홉산숲은 2004년 산림청에 의해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됐다.

2003년 문백섭 대표가 ‘아홉산숲 생명공동체’를 설립하고 전문가와 환경단체에게 학술적 목적으로만 제한적으로 입장을 허락하던 아홉산숲은 2015년 3월부터 숲의 일부를 일반에 개방했다. 생태치유 프로그램을 본격 운영한 것도 이때부터다.

하늘 뒤덮은 평지대밭의 초록 바람

소박한 돌담 안에 목련이 흐드러진 아홉산숲 입구에는 눈에 잘 띄도록 ‘방문수칙’을 세워 놓았다. ‘수칙과 관리인의 안내를 따르지 않을 경우 퇴장을 요구할 수 있다’는 문구는 경고에 가깝다. 5,000원이나 내고 들어 온 관람객이 다소 기분 상할 수도 있지만 ‘후손에게 물려줄 모범적인 생태공간으로 유지’하기 위한 취지라는 설명에 누구나 이해한다.

아홉산숲 초입의 수양목련. 수양버들처럼 늘어진 가지에 나비가 날아가듯 꽃이 피었다.
아홉산숲 초입의 수양목련. 수양버들처럼 늘어진 가지에 나비가 날아가듯 꽃이 피었다.
빈틈없이 빼곡한 대숲
빈틈없이 빼곡한 대숲
한 젊은 커플이 대숲을 배경으로 ‘인생사진’을 찍고 있다.
한 젊은 커플이 대숲을 배경으로 ‘인생사진’을 찍고 있다.
대숲 지나면 매끈한 몸매를 자랑하는 금강송숲이 나온다.
대숲 지나면 매끈한 몸매를 자랑하는 금강송숲이 나온다.
만개한 진달래가 어두운 숲을 밝히고 있다.
만개한 진달래가 어두운 숲을 밝히고 있다.
푸른 빛이 감도는 평지대밭은 최고의 산책 코스다.
푸른 빛이 감도는 평지대밭은 최고의 산책 코스다.

입구에서 계단을 오르면 가장 먼저 ‘구갑죽(龜甲竹)’이 반긴다. 껍질 문양이 거북 등처럼 생긴 대나무다. 1950년대에 문동길씨가 중국에서 일본을 거쳐 들여온 뿌리를 이식한 것이 작은 정원을 이룰 만큼 번졌다. 1990년대 중국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전만 해도 국내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대나무였다. 구갑죽 정원을 거느린 살림집 관미헌(觀薇軒)은 ‘미동(고사리골)’이라는 지명과 ‘고사리조차도 귀하게 여긴다’는 문씨 일가의 자연철학을 담은 이름이다. 1961년 아홉산숲의 목재로만 지어 지금도 산주 일가와 직원들의 생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아홉산숲에서 사람을 위한 공간은 이 집과 정원 구역이 거의 전부다.

관미헌 왼편부터는 본격적으로 숲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다. 조금만 발길을 옮기면 넓은 대숲이 반긴다. 대나무 중에서도 가장 굵은 맹종죽이 하늘로 쭉쭉 뻗어 빼곡하게 숲을 이룬다. 관람객이 맘대로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산책로에서 가까운 한 귀퉁이는 사진 찍는 장소로 활용하도록 공간을 허락했다. 대숲에서 조금 위로 오르면 아름드리 금강소나무 숲이 자태를 뽐낸다. 전국의 오래된 소나무마다 송진을 채취하며 남은 생채기가 깊게 파여 있는데, 수령 400년 가까운 이곳 금강송은 매끈한 몸매를 자랑한다. 태평양전쟁으로 수탈이 극심하던 일제강점기에 문중에서 놋그릇을 숨기는 척하며 순사의 관심을 돌려 지켜낸 덕분이다. 놋그릇을 내주고 살아남은 나무 중 116그루는 보호수로 지정됐다.

짙은 나무 그늘 아래 분홍빛 환한 진달래 군락지를 지나면 길은 다시 한번 울창한 대숲으로 연결된다. ‘평지대밭’이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인 이 맹종죽 숲은 1960~70년대 부산 동래지역 식당에서 잔반을 얻고 분뇨차를 불러 거름을 내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평지대밭은 입구의 대숲보다 더 울창해 바닥에서 솟구친 초록이 하늘까지 뒤덮어 볕이 들지 않는다. 어둑어둑한 대나무 밀림에 두 사람 나란히 걸을 만한 오솔길만 나 있어서 잠시 딴 세상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그 신비로운 분위기 덕에 ‘군도’ ‘협녀’ ‘대호’ 등 여러 영화의 배경이 됐고, 드라마 ‘옥중화’ ‘달의 연인 보보경심’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그래서인지 호젓하게 산책을 즐기려는 이들뿐만 아니라 발랄하게 ‘인생사진’을 찍는 연인들의 모습도 흔히 보인다. 평지대숲을 한 바퀴 돌면 길은 다시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 온다. 약 1시간30분 정도의 숲 속 산책이 짧게만 느껴진다.

아홉산숲을 지키는 것은 산주뿐만 아니라 모든 관람객의 의무.
아홉산숲을 지키는 것은 산주뿐만 아니라 모든 관람객의 의무.

알음알음 소문이 나고 관람객이 늘면서 아홉산숲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대를 이어 최상의 자연을 후손에 물려줘야 한다는 당위에 비춰 일일 관람객을 제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아홉산숲까지 가는 길은 승용차를 이용하면 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 기장철마IC에서 가깝다. 대중교통으로는 부산지하철1호선 노포역에서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는 2-3번 기장군 마을버스를 타고 미동마을에 내리면 된다.

부산=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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