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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정치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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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정치 판사

입력
2018.06.07 19:00
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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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판사 생활을 정리하고 대학교수로 옮긴 뒤 일본 사법제도를 비판하는 소설을 잇따라 내 화제를 모은 세기 히로시(瀨木比呂志)라는 일본 법학자ㆍ작가가 있다. 2014년 ‘절망의 재판소’로 시작해 ‘일본의 재판’ ‘검은 거탑 최고재판소’ ‘재판소의 정체 법복을 입은 공무원들’ 등에서 그가 거듭 비판하는 것은 일본 사법부의 관료화와 권력화다. 그는 소설에서 법관 개개인의 독립을 최상의 가치로 지켜야 할 조직에 상하 질서가 공고해지고, 사법부가 끊임없이 정치권력의 눈치를 살피려 드는 행태를 고발한다.

▦ 의료계 내막을 파헤친 유명 소설이자 드라마 ‘하얀 거탑’ 제목을 본 뜬 것으로 보이는 ‘검은 거탑 최고재판소’에는 신문기자가 소설의 주인공인 판사를 향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 있다. “보수 본류라고 자칭하는 국민당, 시대에 뒤떨어진 국수주의자 국민당은 실은 미국에 머리 못 드는 그 충견이고, 최고재판소는 그런 정부의 또 다른 충견이다.” 작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실제로 “일본 최고재판소는 정부의 충견 같은 존재”라며 “최고재판소가 권력의 의향을 늘 살펴가며 움직인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 그는 소설에서 우리 대법원 법원행정처와 비슷한 조직인 최고재판소 사무총국이 얼마나 정치적이며 사법 독립을 파괴하는지 비판한다. 사무총국은 재판관협의회라는 회의체를 이용해 원전 가동중지 소송 같은 사회적 관심이 큰 재판에 대한 “견해”를 미리 제시한다. 이런 “의향”이 “상명하복”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관철된 결과, 3ㆍ11 동일본 대지진이 있기 전 제기됐던 18건의 원전 가동중지 소송 중 중지 판결은 2건에 불과했다고 한다.

▦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문건 일부가 공개돼 법원이 벌집 쑤신 듯하다. 문건에는 상고법원 신설을 위해 정권과 ‘영장 없는 체포’나 ‘수사기관 단기 구금 허용’ 등 기본권을 침해하는 판결 거래를 하지 않았나 의심할만한 내용이 있다. 이념적 잣대로 판사들 뒷조사를 하거나 민변, 변협을 압박하려 한 정황도 드러났다. ‘사법 독립’ 운운하며 베일을 치던 법원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상만 해도 어안이 벙벙하다. 금석문을 보면 ‘法‘이라는 한자어는 시비ㆍ선악을 판단하는 상상의 동물 해태가 잘못한 사람을 가둔다는 의미라고 한다. 해태는 법 자체이지 판사일 리 없다. 그 또한 시민처럼 법의 재단을 받는 대상일 뿐이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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