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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st’라면 뭐든지 좋아

입력
2017.05.1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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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에서 시작된 북유럽 열풍이 이제는 라이프스타일로까지 확대됐다. 휘게와 피카로 대표되는 북유럽의 정신과 삶의 태도가 헬조선의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인테리어에서 시작된 북유럽 열풍이 이제는 라이프스타일로까지 확대됐다. 휘게와 피카로 대표되는 북유럽의 정신과 삶의 태도가 헬조선의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을 본떠 말하자면, 모든 행복한 나라는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고, 모든 불행한 나라는 제 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 이 기준에 따라 나누자면 세계는 북반구와 남반구로 나뉘는 것도 아니요, 동양과 서양으로 나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북유럽과 그 나머지 나라들로 분류될 뿐이다.

모든 행복한 나라의 원형, 스칸디나비아반도의 국가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망라해 다양한 분야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선망의 대상으로 세계를 제패하고 있다. 탄탄한 사회 안전망으로 대표되는 사회복지, 저녁이 있는 삶, 창의적 교육, 도전이 가능한 창업 풍토와 창업가 정신, 성 평등한 고신뢰사회…. 이런 거대 담론뿐이 아니다. 인테리어, 디자인, 가구, 그릇, 패션 등 미시적 문화 트렌드에 이르기까지 ‘북유럽st’(스타일)이라는 라벨이 붙어 흥하지 않은 것이 드물다. 심지어 온라인쇼핑몰에는 북유럽 칫솔, 북유럽 기저귀까지 ‘핫딜’ 상품으로 맹렬히 마케팅 중이다. 척박하기로 유명한 음식 문화까지 노르딕 퀴진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적 미식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으니, 꺼질 줄 모르는 북유럽 열풍은 이제 트렌드라기보다 거대 사조라 불러야 마땅할 듯 보인다.

북유럽의 식문화는 건강한 식재료를 간단히 만들어 먹는 데 방점이 있다. 복잡한 노동보다는 좋은 재료를 더 중시하는 태도가 저녁이 있는 삶의 여유를 만든다. ‘휘게 라이프스타일 요리’ 제공
북유럽의 식문화는 건강한 식재료를 간단히 만들어 먹는 데 방점이 있다. 복잡한 노동보다는 좋은 재료를 더 중시하는 태도가 저녁이 있는 삶의 여유를 만든다. ‘휘게 라이프스타일 요리’ 제공

한국에 상륙한 노르딕 퀴진

국내 첫 노르딕 전문 레스토랑 스뫼르. 덴마크어로 버터를 뜻하는 이름의 이 식당은 지난달 초 첨단 유행의 성지인 서울 연남동에 문을 열었다.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최재윤(32) 셰프와 그의 덴마크인 친구 캐스퍼 소랜슨(31)씨가 함께 운영하는 레스토랑이다. 평소 건강한 재료로 건강한 음식을 만드는 데 관심이 많았던 최 셰프는 한국학을 공부하러 한양대에 교환학생으로 온 캐스퍼와 친구로 지내며 ‘가장 좋은 식재료가 가장 좋은 음식이다’라는 덴마크의 음식 철학에 크게 감동 받았다. “사실 덴마크가 낙농국가라 버터나 마요네즈를 베이스로 한 소스가 많고, 어떤 음식은 고기를 듬뿍 써요. 하지만 대부분은 좋은 식재료를 구하려 각별히 애쓰고, 조리방법도 데치거나 스팀기로 찌는 간단하면서도 건강한 방식을 택하고 있죠.”

덴마크 레스토랑 스뫼르의 오픈 샌드위치. 이눅희씨 제공
덴마크 레스토랑 스뫼르의 오픈 샌드위치. 이눅희씨 제공

스뫼르의 메뉴판에 올라온 음식들은 덴마크의 가장 유명한 음식인 오픈 샌드위치, 호밀빵, 훈제연어, 시나몬롤, 에그 프라이, 자몽주스 등 그야말로 간단하면서도 건강한 음식들이다. 밑빵에 아보카도, 연어, 새우 등 다양한 재료를 올리고 빵으로 뚜껑을 덮지 않은 채 그대로 서빙하는 오픈 샌드위치는 전 세계의 다양한 식재료들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실험과 도전이 계속되고 있는 코스모폴리탄적 메뉴. 반면 샌드위치에 사용되는 호밀빵은 덴마크 전통문화의 상징이다. 집안마다 내려오는 사워종(천연효모) 레시피가 따로 있어 매번 반죽을 할 때마다 조금씩 떼어내 섞는 식으로 대대손손 계승한다. 100년 넘는 반죽을 이어오는 집안들도 적지 않다고. 불씨를 꺼트리면 쫓겨났던 조선시대 며느리처럼 반죽을 망치면 친척 집에 달려가 조금 얻어다 ‘꺼진 불씨’를 되살려 가문의 유산으로 남기는 빵반죽이다. 스뫼르의 오픈샌드위치에 사용되는 호밀빵 역시 캐스퍼씨가 덴마크에서 올 때 집안 대대로 쓰던 100년 전통의 사워도우를 가져와 만든 빵이다.

“레스토랑에 찾아오는 북유럽 손님들과 음식 얘기를 하다 보면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아요. 식재료와 음식에 대한 이해가 셰프인 저 못지 않게 깊더라고요. 평범한 사람들도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 자주 놀라죠.” 매년 선정되는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50에서 2012년부터 연속 3회 1위를 차지한 덴마크 코펜하겐의 ‘노마’가 바로 이 식재료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토대로 세계 미식계를 이끌고 있는 노르딕 퀴진의 제왕이다. 또 하나의 북유럽 트렌드로 급부상하고 있는 건강하면서도 검소한 식생활은 저녁이 있는 삶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문화적 기반이기도 하다.

가족끼리의 아늑한 티타임을 뜻하는 휘게는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 문화의 핵심이다. ‘휘게 라이프스타일 요리’ 제공
가족끼리의 아늑한 티타임을 뜻하는 휘게는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 문화의 핵심이다. ‘휘게 라이프스타일 요리’ 제공

‘저녁이 있는 삶’ 가능케 한 검박한 식문화

북유럽 음식 문화에 대한 관심은 식재료 판매점과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확인된다. 이케아 광명점의 푸드마켓에서는 링곤베리 잼과 감자전 뢰스티, 미트볼, 훈제 연어 등을 구매하기 위해 주말이면 늘 긴 줄이 늘어서 있다. 핀란드 상품을 판매하는 쇼핑몰을 운영 중인 ‘미녀들의 수다’의 출연자 따루 살미넨씨는 “핀란드를 좀 더 자세히 알려는 분들이 늘면서 핀란드 커피와 베리 가루도 인기가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핀란드는 '1인당 커피 소비량 세계 1위' 나라로, 하루에 7, 8잔씩 커피를 마시는 이들도 많다. 그러다 보니 커피의 종류도 많고 품질도 뛰어나 입소문이 나고 있다는 것. ‘휘바휘바'(좋다는 의미의 핀란드어)로 알려진 '자일리톨' 분말 가루 역시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핀란드는 일조량이 충분치 않아 과일이 자라기에 적합한 기후가 아니에요. 사과와 베리 종류만 자라죠. 그래서 베리를 이용해 다양한 음식이나 요리를 많이 해먹는데, 요즘 한국에서 그 베리 분말을 찾는 분들이 늘고 있어요.”

휘게 타임을 즐기고 있는 덴마크인 가족. ‘휘게 라이프스타일 요리’ 제공
휘게 타임을 즐기고 있는 덴마크인 가족. ‘휘게 라이프스타일 요리’ 제공

인테리어에서 라이프스타일로 ‘휘게’

북유럽 인테리어가 유행하기 시작한 지 십 수 년이 지났건만, 흡사 해가 지지 않는 나라처럼 이 유행에는 퇴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퇴조는커녕 삶의 형태 자체를 북유럽풍으로 바꾸려는 열망만 더 커지고 있다. 일조량이 적어 집안에 오래 기거해야 하는 겨울왕국의 신민들과는 지정학적 위치와 처지가 다름에도, 아늑한 촛불에 푹신한 쿠션을 갈구하는 ‘휘게(hygge)’ 욕망이 2017년을 강타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사람과 보내는 즐거운 시간’이라는 의미의 휘게는 번역이 불가능한 덴마크 고유의 문화다. 애프터눈 티타임과 형식은 비슷하지만, 아늑하고 안락하게 가족끼리 둘러앉아 촛불 아래 다과를 즐기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라는 내용적 측면에 보다 방점이 찍힌다. 화려하기보다는 소박하고, 배제하기보다는 환대하며 세련되고 고급스럽기보다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것을 추구하는 가족문화다. 원색과 무채색이 미니멀리즘의 원리 아래 구현된 인테리어의 차원을 넘어 삶과 생활양식 자체를 보다 근원적으로 ‘북유럽st’로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휘게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휘게타임을 위한 양초, 식기, 쿠션 같은 인테리어 소품에서부터 휘게의 철학을 설파하는 다양한 종류의 책까지 휘게 상품들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해 연말 출간된 ‘휘게 라이프’(위즈덤하우스)를 시작으로 ‘휘게 라이프스타일 요리’(황금시간), ‘휘게 덴마크식 행복 라이프스타일’(다름북스), ‘휘게 스타일’(위즈덤스타일), ‘편안하게 따뜻하게 휘게’(새로운 발견) 등 휘게는 현재 출판계의 가장 핫한 키워드 중 하나다. 휘게의 스웨덴 버전인 피카(fikaㆍ커피)도 마찬가지.

북유럽적 삶의 정신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인테리어부터 식문화, 정치 사회적 제도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관통하는 철학이 있다. 나날의 삶 속에서 이 철학을 실천하는 노력이 있어야만 북유럽 라이프스타일은 가능해진다. 게티이미지뱅크
북유럽적 삶의 정신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인테리어부터 식문화, 정치 사회적 제도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관통하는 철학이 있다. 나날의 삶 속에서 이 철학을 실천하는 노력이 있어야만 북유럽 라이프스타일은 가능해진다. 게티이미지뱅크

북유럽의 형식적 요소가 아닌 보다 본질적인 문화와 제도에 관심을 기울이는 추세는 출판계의 출간 종수를 살펴보면 뚜렷하다. 16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2012년 6종에서 2013년 25종, 2014년 15종으로 폭발한 북유럽 취미 분야 출간 서적은 지난해 3종으로 급격히 줄었다. 반면 정치ㆍ사회 분야는 2015년 각각 5종으로 출간이 늘었고, 2016년에는 역사ㆍ문화가 5종으로 북유럽 관련해 가장 많이 책이 나왔다.

스웨덴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요리법과 함께 소개한 책 ‘피카’를 출간한 조소정 위고출판사 대표는 “시장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성공지향적 삶을 추구해온 한국인들에게 꼭 필요한 문화라고 생각해 출간을 결정했다”며 “독자 반응이 너무 좋아 오히려 좀 놀랐다”고 말했다. “북유럽의 퀄리티 높은 삶이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게 아니잖아요. 생활 전반에서 추구하는 게 우리랑 너무 달랐고, 그게 성공지향적인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덕목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들은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누리기 위해 노력하는 게 몸에 밴 사람들이거든요. 우리는 커피도 달리면서 마시는데 말이죠.”

북유럽의 형식에서 북유럽의 정신으로, 거대한 문화의 지각변동이 이뤄지고 있다. 이토록 오래 지속되는 유행은 더 이상 유행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치 않을지 모른다. 형식적 아이템에서 근원적 삶의 철학까지, 북유럽 문화는 이제 유행이 아니라 사조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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