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조태성 기자

등록 : 2017.03.10 04:40

전쟁 속 보통 사람들 이야기... 2차 대전 서술의 결정판

[리뷰] 앤터니 비버 ‘제2차세계대전’

등록 : 2017.03.10 04:40

특정 영웅의 활약상 나열 없이

별 볼일 없는 사람들 운명 언급

일본군→소련군→독일군 전전

한국인 양경종의 이야기도 담아

18세에 일본군이 징집된 뒤 소련군이 됐다 독일군이 됐다가 1944년 노르망디에서 연합군 포로로 붙잡힌 한국인 양경종. 전쟁은 보통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 민족의 이름 아래 예측불가능한 삶을 살게 한다. 글항아리 제공

제2차세계대전

앤터치 비버 지음ㆍ김규태 등 옮김

글항아리 발행ㆍ1,288쪽ㆍ5만5,000원

전쟁사학자 앤터니 비버가 쓴 ‘제2차 세계대전’은 역설적이게도, 반드시 읽어보라고 쉽게 말하긴 어려운 책이다.

가격 5만5,000원에 본문 1,200쪽이 넘어가는 1.6㎏짜리 책이니 그렇다. 출판사는 띠지에다 “톨스토이가 쓴 2차 세계대전사를 읽는 것 같다”는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지의 서평을 인용해뒀다. 전체 서술 톤을 보면 짐작되는 바 없는 건 아니지만, 미안하게도 그런 순수한(?) 의도와는 달리 톨스토이를 거론하는 게 ‘자랑’인지 ‘자학’인지는 헷갈린다. 톨스토이 소설만 해도 허덕거렸던 이들이 많았을 텐데, 굳이 2차 세계대전사를 ‘톨스토이 버전’으로 읽는다는 건…. 그냥 상상만 하기로 하자.

그보다는 워싱턴포스트의 서평 한 구절을 옮겨놓고 싶다. “맞다. 2차 대전에 관한 두꺼운 책을 쓸 여지는 많았다. 그런데 비버가 이 책을 써버렸으니 이제 그 선반이 꽉 차버렸다. 그의 책은 결정판(the definitive history)이다.” ‘마르고 닳도록 우려먹고 또 우려먹은 2차 세계대전 얘기, 뭐 별게 있겠어?’ 싶을 수 있지만, 결정판답게 일단 한번 읽기만 하면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란 말만큼은 확실히 할 수 있다. 이야기의 규모, 서술의 속도감, 비버의 장기 중 장기인 매혹적인 장면 하나에 대한 압도적 묘사, 세계사적 사건을 다루면서도 특정 영웅이나 사건을 뛰어넘어 별 볼일 없는 보통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언급하는 서술전략 등.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역시 ‘보통 사람의 운명’이다. 국내에 ‘스페인 내전’(교양인),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다른세상), ‘디데이’(글항아리)가 번역되면서 ‘밀덕’(군사 마니아)들에게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고, 그 외 몇 가지 책까지 합쳐 전세계적으로 30개 언어로 600만부 이상 책을 팔아 치웠다는 이 노련한 영국 전쟁사학자는, 전쟁사학자임에도 이런저런 영웅적 활약상의 나열, 극렬한 선악의 대비, 결정적 승기를 잡는 부분에 대한 묘사, 신묘한 전략전술 따위에 대해선 별다른 언급이 없다.

난징에서 중국인 포로를 학살하는 일본군. 글항아리 제공.

오히려 그 반대다. 히틀러는 애초부터 악마처럼 유대인 말살까지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몽고메리는 건방졌고, 롬멜은 오만했다. 처칠은 순전히 ‘영국군이 복수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광기어린 독일 본토 공습 작전을 승인해놓고서는 잔혹한 폭격이 문제가 되자 자기는 몰랐다는 듯 발을 뺐다. ‘일국 사회주의론’을 설파했다는 스탈린은 보수주의자를 당연하게도 싫어했지만, 가장 혐오한 건 역설적이게도 ‘가장 진실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대신 저자는 보통 사람에게 눈을 돌린다. 그래서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인물은 ‘한국인 양경종’이다. 1920년에 태어난 양경종은 1938년 일본군으로 징집됐다가 소련군에 붙잡혔다. 소련은 그를 노동력으로 부려먹다 유럽 전선에 내보냈고 1944년 양경종은 다시 독일군 포로가 됐다. 이번엔 독일군 병사가 되어 싸우다 영국군 포로가 됐다. 종전 뒤 그는 과거에 대해 입을 닫은 채 미국으로 건너가 1992년 그곳에서 숨졌다. 그의 72년 인생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책 마무리에 등장하는 얘기는 1945년 6월에 작성된 프랑스 비밀경찰 보고서다. 그 보고서엔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나치가 농장에 배치시켜줬던 프랑스 남자와 사랑에 빠진, 그래서 종전 뒤 이 프랑스 남자를 찾아 파리로 몰래 잠입했다 붙잡힌 한 독일 여성의 사연이 실려 있다. 그래 놓고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그 애인(프랑스 남자)도 집으로 돌아와서 자기가 없는 사이 독일 군인의 아이를 밴 아내와 마주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유명한 정치가, 장군의 말 못지 않게 작전에 참여한 병사 등 평범한 사람들의 편지, 메모가 수시로 등장한다.

또 한가지.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은 흔히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이요, 가장 결정적 전투는 정치적 성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 혹은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이 꼽히기 마련이다. 서술의 주된 포인트는 유럽에서의 밀고 당김이다. 그 때문에 ‘세계’대전이라 해놓고, 실제로는 ‘대서양전쟁’, 혹은 ‘유럽전쟁’ 수준의 서술에 그친다. 서구인들 입장에서야 그게 자기네들의 ‘World’일 테니까.

하지만 저자가 꼽는 가장 중요한 전투는 소련의 주코프 장군이 1939년 5월 12일 개시한 할힌골 전투다. 소련과 몽골군이 몽골-만주 국경 일대에서 일본군을 박살낸 전투다. 왜 이 전투일까. “일본은 예상치 못한 패배에 중심부까지 흔들린 반면, 적군인 중국군, 즉 국민당과 공산당은 모두 고무되었다. 도쿄에서는 대소련전을 지지하는 북진파가 꼬리를 내리게 되었고, 해군이 주도하는 남진파는 향후 그 세력을 더해갔다.(중략) 일본은 프랑스와 네덜란드, 영국령 동남아시아 식민지 쪽으로 눈을 돌렸고, 심지어 태평양의 미국 해군까지 공격했다.”

소련에 대한 두려움으로 남벌에 나섰던 일본은 결국 태평양전쟁으로 미국을 끌어들였다. 1945년 9월 2일 미주리함상에서 열린 일본의 항복 조인식. 글항아리 제공

저자의 요점을 추리자면 러일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소련이었다. 할힌골에서의 패배로 두 번 다시 소련과 맞붙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대신 만만한 상대로 고른 것이 미국이었다. 소련보다 미국이 만만하다고? 제국주의 일본이 서구식 자유주의 풍토를 얼마나 경멸했는지 감안해본다면 미국보다 ‘붉은 군대’를 더 무서워했다는 게 이해할 만은 한데, 참 어리석다 싶기도 하다. 이 결정으로 소련은 히틀러와의 대결에 집중할 수 있었고, 진주만 습격은 미국에 참전 명분을 가져다 주었다. 이런 시각 때문에 저자는 중일전쟁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태평양전쟁에 대한 서술을 대대적으로 늘렸다. 수세에 내몰린 일본이 1944년 중국을 상대로 벌인 ‘대륙타통작전’이 불러온 아이러니도 흥미롭다. ‘세계’대전다운 서술이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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