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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형체 없는 것의 대단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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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형체 없는 것의 대단한 힘

입력
2018.04.02 14:02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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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수천 년 간 지속된 세계관을 일거에 뒤흔든 이가 있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바로 그다. 그는 해를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여 근대과학으로의 획기적 전환을 일궈냈다.

다소 현학적이지만 지금도 획기적 전환을 두고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가 인류사에 미친 영향이 자못 깊고도 길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서구 역사에서 서구를 대표할 수 있는 학자를 꼽으라고 할 때 그가 꼽힐 여지는 얼마나 될까. 가령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보다 그가 더 위대하다고 여겨질 가능성은 얼마 정도일까. 시선을 한자권으로 돌려, 조선 실학자 홍대용이 지동설을 언급했다고 하여 그가 공자나 맹자, 순자보다 더 높게 평가될 리가 과연 얼마나 클까 하는 말이다.

세계관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하여 무기력한 게 아니라, 한 문명권 수천 년의 역사를 대표하는 위대한 인물마저도 그 영향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음이다. 소크라테스나 공자 같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 불리는 이들도 자기 시대에 공유되던 세계관을 벗어나 사유하지 못했음을 보면 말이다. 아무리 불세출의 천재일지라도, 코페르니쿠스의 시대처럼 과학기술의 발달과 생산력의 진보 등이 함께 이뤄지지 않는 한, 한 시대나 문명을 지배하는 세계관의 돌파는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얘기다.

비단 세계관뿐만이 아니다. 어떤 관념이나 사상 등도 마찬가지다. 모두 무형의 정신적 소산이지만 그들이 지니는 힘은 때에 따라선 절정의 군사력이나 물리력보다 강력하고 오래 지속되기도 한다. 우리가 관념의 소산일 뿐이라 무시한다고 하여 실제로 무기력한 건 절대 아니라는 소리다. 그런데 무형의 것들이 어떻게 우리네 삶과 사회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까.

세계관이든 관념이나 사상이든, 이들은 말에 담겨 표현되고 말로 전파된다. 그리고 인간은 말을 구사하는 존재인 동시에 말에 의해 지배 받는 존재다. 말이 없거나 말을 할 줄 모른다면, 설사 신들의 신이 일러준 세계관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그것의 영향을 도통 받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세계관이나 관념 등이 말을 부려서 우리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고.

자기가 힘이 있다고 믿는 이들이 말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음이 이 때문이었다. 실제로 말을 지배하면 사람을 또 세상을 지배할 수 있기에 그랬다. 역사 장악은 물론 신도 장악할 수 있었다. 역사도 결국 말에 의지해 기록되고 기념되며, 신 또한 말에 기대어 상상되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말을 배웠음에도 모어(母語)가 아니라 모국어라 하는 것처럼, 곧 나라(國)로 대변되는 제반 권력관계가 말에 스며들어 있듯이, 말에 무언가를 섞어 넣고는 그것으로 사람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여 사심 가득한 정치인이나 언론인, 삶터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사회적 갑들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말의 힘을 적극 활용하고, 불리하다 싶으면 말이 힘을 못 쓰게 만들어버린다. 말의 뿌리를 잘라내버리는 것이다. 말이 과실이라면 말한 이는 뿌리다. 뿌리가 거세된 말은 유령에 불과하다. 정계와 족벌 언론서 양산되는 ‘막말’과 ‘아무말’이 유령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다만 막말과 아무 말은, 지금도 귀신에게 홀렸다고 표현하듯 유령처럼 삶터를 배회하며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파렴치한 정치인과 언론인이 동일 사안에 대해 과거에 한 말과 정반대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음에도 사람들이 귀를 쫑긋하며 마음을 움직이는 까닭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좌우되니 그들은 막말과 아무 말만으로도 기득권을 어지간히 유지해가기도 한다.

공자는 요새로 치자면 막말과 아무 말을 생각 없이 내뱉은 제자 자로에게 군자는 모르는 바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 없듯이(闕如ㆍ궐여) 처해야 한다고 엄히 경계했다. 공자 당시 군자는 관리나 학인, 그러니까 오늘날의 공직자나 소위 여론 주도층을 가리켰다. 개인적, 사적으론 어찌 행하든 간에 적어도 공직만큼은 막말이나 아무말로 수행해서는 안 된다는 일갈이다.

교언(巧言)처럼 뿌리 없는 말을 평생 일관되게 멀리하고, 말을 하면 반드시 실행으로 옮겨지는, 그런 미더운 말만 참된 말이라 여겼던 그다운 태도였다. 맹자가 한 말의 모음집이 맹자이고 장자가 한 말의 모음집이 장자인 것처럼, 말이 곧 그 사람 자체라고 믿었던 시대정신의 소산이었다. 말의 품격은 곧 말한 이의 인품이라 여겼던 사람들이 품었던 당연한 정신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가 아니라, 그런 사람이기에 그런 말을 했다고 판단했음이다. 사람은 괜찮은데 막말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막되었기에 그의 입에서 막말이 나왔구나 한다는 것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 우기는, 그런 함량 미달의 인간이구나 정도로 치부하고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진 않았다는 얘기다. 적어도 제대로 된 사람은 아니라는 분명한 판단을 내리면서 막말을 대했다는 것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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