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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삭 기자

등록 : 2017.11.22 18:21
수정 : 2017.11.23 10:03

무혈 쿠데타에도… 짐바브웨 미래는 잿빛

포스트 무가베 시대… 대권 이을 음난가그와 폭압정치 가능성 커

등록 : 2017.11.22 18:21
수정 : 2017.11.23 10:03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한 21일 수도 하라레에서 어린이들도 거리로 몰려 나와 국기를 흔들며 독재자의 퇴진을 기뻐하고 있다. 하라레=AP 연합뉴스

37년 동안 짐바브웨를 쥐락펴락 해온 로버트 무가베(93)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결국 사임을 발표하면서 세계 최장수ㆍ최고령 철권통치는 막을 내렸다.

아프리카 권력 투쟁사에서 흔히 목격하는 유혈사태 하나 없이 이뤄 낸 평화적 정권 교체에 국제사회도 놀란 분위기가 역력하다. 하지만 무가베가 남긴 독재의 그늘은 짐바브웨 미래에 장밋빛 전망만 드리우진 않고 있다.

이날 오후 제이콥 무덴다 짐바브웨 국회의장이 국영TV를 통해 무가베의 사임서를 대독하며 ’독재의 종언’을 고하는 순간, 의사당은 흥분의 도가니로 돌변했다. 영국 BBC방송은 “의원들이 얼싸안고 춤을 추는 등 축제의 현장 같았다”고 전했다. 열기는 고스란히 짐바브웨 전역으로 번졌다. 수도 하라레에서는 시민 수천명이 거리로 몰려나와 자동차 경적을 울리고, 국기를 흔들면서 독재자의 퇴진을 자축했다. 5개월 된 딸과 함께 기쁨을 만끽하던 밀드레드 타드와는 “내 딸은 더 나은 짐바브웨서 자라날 것”이라며 한껏 자부심을 드러냈다.

15일 군부 쿠데타로 시작돼 일주일 만에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 내린 이번 사태는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현대적 쿠데타(영국 일간 가디언)’라는 해석이 나올 만큼 군사정변에 으레 뒤따르는 피의 대가가 전혀 없었던 탓이다. 군부의 국정 개입이 발단이 됐지만, 정치권은 41세 연하 부인 그레이스(53)에게 권력을 물려주려는 ‘부부세습’에 반대했고, 무가베가 자진 사퇴를 거부하자 ‘탄핵 추진’이란 민주적 절차로 응수했다. 여기에 독재를 규탄하는 수만명의 거리 시위 등 민심의 분노가 더해지면서 아프리카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무혈 쿠데타’로 남게 됐다. 가디언은 “그간 폭력적이었던 아프리카 국가들의 권력 이동과 달리 짐바브웨가 국제사회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진단했다. 부패로 얼룩졌다고는 하나 무가베가 나라를 식민통치에서 해방시킨 독립영웅이라는 점도 그가 별다른 신변 위협 없이 물러나는, 정상 참작 요인이 됐을 것이란 분석이다.

그러나 ‘포스트 무가베’ 시대를 낙관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대권을 이어받을 에머슨 음난가그와(75) 전 부통령부터가 적폐 인사다. 음난가그와는 24일 대통령직에 공식 취임해 내년 대선 전까지 짐바브웨를 이끌 예정이나 군부 지지 하에 정권을 쥘 가능성이 높다. 그는 6월 전격 해임되면서 정권 교체의 단초를 제공했지만, 철저히 무가베의 수족으로 살아 왔다. 오죽하면 잘 연마된 생존 본능을 빗대 ‘악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을 정도다. AP통신은 “음난가그와는 40년 동안 무가베에게서 권력을 장악하고 휘두르는 법을 배웠다”고 평했다. 음난가그와는 비밀경찰 중앙정보기구(CIO)를 이끌면서 폭압 통치의 대명사로 악명을 떨쳤다. 1980년대 초 무가베에게 반기를 든 소수민족 은데벨레족 1만~2만명을 학살하는 등 인종 청소에 관여했다는 의혹도 받는다. 폭로전문사이트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문건에는 그를 “무가베보다 더 폭력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무가베가 떠넘긴 암울한 경제적 유산도 짐바브웨의 새 출발을 더디게 할 전망이다. 이 나라는 한 때 다이아몬드 등 풍부한 지하자원을 기반으로 아프리카에서 경제 여건이 가장 탄탄한 나라로 꼽혔다. 1980년 총리에 취임한 무가베가 ‘아프리카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백인 지주들에게서 토지와 농장을 무상 몰수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막대한 부가 권력 유지를 위해 친인척과 핵심 권부에 집중되면서 국가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현재 인구 1,300만명인 짐바브웨의 실업률은 80%가 넘고 300만명은 일자리를 찾아 이웃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전전하고 있다. 산업 부문 생산시설 가동률도 30%가 채 안된다. 짐바브웨 주재 미국 대사관은 “이번 사태가 어떻게 끝나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로 이어져야 한다”며 차기 대선이 민주주의 정착 여부를 가늠할 성패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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