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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석학 칼럼] 폭력에 구애하는 트럼프

입력
2017.07.3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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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CNN 방송 로고를 한 사람의 얼굴을 자신이 가격하는 비디오 영상을 트위터에 공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보고 사람들은 미국 대통령의 또 하나의 천박한 장난으로 치부했을지 모른다. 볼썽사납지만 특이한 일도 아닌 것처럼. 그러나 이를 보다 불길한 징조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부에 비판적인 언론 보도를 “가짜 뉴스”라고 줄곧 폄하해왔다. 마치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판사들을 “소위” 판사들이라고 낙인찍어 사법체계의 독립적 권위를 침해하려고 하듯 말이다. 그는 이런 모욕적인 별칭을 직접 ‘국민’에 트위트 하는 습관이 있다. “현대의 대통령”이라며 그가 말하는 소통 방식이다. 사실, 듣기 싫게 떠드는 군중 앞에서 이렇게 비난하는 방식으로 민주체제를 침해하는 행위는 전혀 현대적이지 않다. 그것은 늘 그랬듯 독재자들이 해왔던 방식이다.

이는 심각한 문제다. 잠재적으로는 훨씬 폐해가 크다. 정상적인 환경에서는 폭력적 행동은 법과 사회규범의 제약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제한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많은 강간사건처럼 가정폭력은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항상 법을 위반하려는 폭력적인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더욱 놀랍고 우려스러운 것은 오랫동안 평화롭게 공동체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서조차 극단적인 폭력이 정말로 빨리 분출될 수 있다는 점이다. 독일의 유대인들은 1933년 나치 리더들이 군중을 선동하기 전까지는 비유대계 이웃의 방해를 받지 않았다. 사라예보에서도 기독교계와 이슬람계는 무장 군인을 등에 업은 세르비아의 선동가들이 추방과 살해를 명령하기 전까지 수세기 동안 평화를 함께 누렸다. 서로를 간섭하지 않고, 오히려 친근한 관계를 맺기까지 했던 인도의 힌두교도와 무슬림은 1947년 무슬림이 대다수인 북쪽이 힌두교가 지배하는 인도 사회에서 떨어져 나오려고 하자 갑자기 상대방을 공격하고 나섰다. 버마에서도 무슬림은 평화롭게 살았으나, 그것도 광적인 수도승의 꼬임에 빠진 불교도들이 무슬림의 집을 불태우고 그들을 때려 죽이기 전에나 가능했다.

우리를 무정부상태와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문명화된 규범이 얼마나 위험스러울 정도로 취약한지는 전세계 많은 사회가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다른 사람보다 만행을 더 잘 저지를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공격적인 충동은 놀랄 정도로 쉽게 활성화한다. 사소한 질투나 단순한 탐욕은 평범한 시민을 야만인으로 너무나 빨리 둔갑시킬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에 얼마나 호전적 성향이 많은지를 보려면 명망 있는 출판물에 게재된 의견에 대한 온라인 댓글을 보면 된다. 정상적인 제약이 없을 경우 자그마한 공적인 충동만으로도 반감이 어떻게 행동으로 옮겨지는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충동의 형태는 간접적이고 모호하게 표현되지만, 동원되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은 이를 즉각적으로 이해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중집회에서 말 그대로 언론을 “쓰레기”라고 공격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선동했다. 나가도 너무 나갔다. 그는 지금 언론인들을 “국민의 적”이라고 의례적으로 비난한다. 지지자들에게는 “가짜 뉴스”가 자신이나 그들의 길에 방해가 되지 못하도록 하라고 은근히 부채질한다.

최근 미 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그렉 지안포르테 공화당 의원은 건강보험에 대한 의견을 묻는 영국 가디언지(紙) 기자를 말 그대로 폭행했다. 더욱 최근에는 전미총기협회(NRA) 기관지가 “꽉 쥔 진실의 주먹으로” 주류언론의 “거짓말”과 맞서 싸울 것을 촉구했다. 다시 강조하건대 이런 위협은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상의 권리 뒤에서 이빨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자칭 애국자들은 그 행간의 의미를 읽어낸다.

유럽과 미국의 요즘 우익 포퓰리스트들이 1930년대 파시스트나 나치와 다른 점은 돌격대원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의 정적을 두들겨 패거나 그 이상의 짓을 하도록 사주하는 나치ㆍ파시스트 자객과 같은 것들이 지금은 없다. 그러나 이것도 점점 변하고 있다. 미국 오리건주의 공화당 하원의원인 제임스 뷰철은 지난 5월 공화당 집회 중 우익 민병대를 공화당 보안요원으로 채용할 것을 암시하기도 했다. 권총을 갖고 있는 이런 극단주의자들은 연방정부를 적으로 간주하는 것을 애국이라고 생각한다. 1930년대 나치 대원들과는 단지 명칭만 다를 뿐이다. 제도화된 폭력의 정치학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 공식적인 허가증을 부여해 그들의 가장 야만적인 충동을 발산하도록 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트를 단지 조잡한 연극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민주주의의 가장 고귀한 대의체제가 폭력을 선동하기만 하면 군중은 이를 이어받는다. 미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민주주의는 그 때 소멸한다.

이언 부르마 미국 바드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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