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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털어놓지만, 아무거나 지껄여대는…익명게시판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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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털어놓지만, 아무거나 지껄여대는…익명게시판의 두 얼굴

입력
2018.01.03 04:4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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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게시판의 두 얼굴] 누구나 털어놓지만, 아무거나 지껄여대는…

짝사랑 상담부터 갑질 폭로까지

솔직한 고백에 공감 댓글 줄이어

여직원 성폭행ㆍ병원 갑질 등

부조리 고발하는 창구 되기도

묻지마 정보에 음담패설도 난무

게시글 보고 "만나보자" 성희롱

"가상화폐 대박" 투기성 성공담

무작정 따라했다 수백만원 손실

한림대 재단 소속 병원 간호사들이 재단의 '일송가족의 날' 행사 장기자랑에 동원돼 공연을 하고 있다. 직장갑질119 제공
한림대 재단 소속 병원 간호사들이 재단의 '일송가족의 날' 행사 장기자랑에 동원돼 공연을 하고 있다. 직장갑질119 제공

#1

"이게 말이 됩니까? 널리 퍼뜨려 주세요"

지난해 11월 3일 직장인들이 이용하는 익명게시판 `블라인드`에 한 가구업체에서 일어난 직장 내 성폭행 관련 글이 올라온다. 글 내용은 또 다른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왔다가 이미 삭제됐던 글인데, 한 네티즌이 글이 삭제되기 전 화면을 갈무리해뒀다 블라인드 게시판에 다시 올린 것이다. 신입 여직원이 동기와 직장 상사 2명에게 연달아 성추행과 성폭행 등을 당했다는 글 내용은 여러 사람의 공분을 사며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급기야 언론에서 이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했고, 글이 올라 온 지 하루 만에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 피해 여성 변호인은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피해자가 회사 요청으로 올렸던 글을 삭제했으나 익명 게시판을 통해 글이 다시 확산하면서 사건이 공론화할 수 있었다”고 고마워했다.

#2

"비트코인 가즈아~"

직장인 한모(38)씨는 요즘 ‘비트코인’이라는 말만 들어도 속이 상한다. 블라인드에서 가상화폐 투자로 재미를 봤다는 사람이 하도 많아 비상금 1,000만원을 털어 비트코인 투자에 나섰다가 큰 손해를 봤기 때문이다. 한 씨가 가상화폐를 구입했던 시기는 비트코인 가격이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 ‘빗썸’에서 2,400만원을 넘어섰던 지난달 8일이다. 하지만 비트코인 가격은 불과 이틀 만에 1,500만원까지 떨어졌고 투자금을 다 잃을까 겁이 났던 한 씨는 급히 비트코인을 매도해 400만원 정도 손해 봤다. 한 씨는 “이틀 정도 지나니 비트코인 가격이 다시 2,000만원을 회복하는 등 널뛰기 장세를 이어갔다”며 “사실상 투기판과 다름없는 곳에 정확한 근거도 없는 익명게시판 글을 보고 발을 디딘 게 잘못이라 생각하고 스마트폰에서 블라인드 앱을 아예 삭제해버렸다”고 말했다.

이름을 가리고 활동할 수 있는 익명 게시판이 우리 사회의 주요 소통 공간으로 부상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 익명 공간의 특성상 짝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사랑 고백부터 회사나 상사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는 등 익명 게시판을 활용하는 방식은 사람 수만큼 다양하다.

익명 게시판의 가장 큰 장점은 남들 앞에서 쉽게 꺼내지 못했던 깊은 속내를 쉽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진정성 있는 얘기는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 내고, 이는 ‘댓글’을 통해 자연스러운 상담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사이가 좋지 못했던 어머님의 죽음 앞에서 후회하는 글이나, 절교했던 친구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담담히 쓴 글에는 ‘힘을 내라’ ‘가슴이 먹먹하다’ 등의 위로하거나 공감한다는 내용의 댓글이 수십 건씩 달리기도 한다.

익명 게시판 중 직장인 인증을 받아야 가입이 가능한 ‘블라인드’의 경우 집단지성의 힘을 빌리는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이곳에서는 이직을 앞둔 사람이 옮기려는 회사의 연봉이나 근무 환경을 묻는 진지한 질문부터 해외 여행지 선택, 강남 지역 맛집을 묻는 가벼운 질문까지 하루에 수십 수백 건의 문답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정치적 사안이나 정부 정책, 사건 사고에 대해 수준 높은 토론도 이따금 이뤄진다

직장인 이세라(28)씨는 “익명으로 질문을 하니 ‘그것도 모르느냐’는 핀잔을 들을 걱정을 할 필요 없어 궁금한 게 떠오를 때마다 질문을 올리는 편”이라며 “다양한 나이와 직업을 가진 사람이 익명 게시판에서 활동하다 보니 웬만한 질문에는 거의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익명게시판의 장점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익명게시판은 종종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폭로 창구로도 활용되고 있다. 이름과 신분을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익명 공간의 특성상 자기가 속해 있는 회사나 조직에 대한 강도 높은 고발도 자주 이뤄진다. 많은 사람의 공분을 산 사건은 언론사에 의해 기사화되고 이는 곧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기도 한다.

지난해 11월 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운영하는 익명게시판인 ‘간호학과, 간호사 대나무숲’을 통해 폭로된 한림대 성심병원 간호사들에 대한 병원 측의 갑질 행태 폭로가 대표적이다. 한 간호사가 재단 체육대회에서 선정적인 옷을 입고 춤을 추도록 강요받았다는 글을 올린 후, 간호사에 대한 병원의 갑질 행태에 대한 고발 제보가 잇따랐고 병원 측은 결국 사과했다. 지난 2014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도 익명게시판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 이밖에 최근 발생한 한샘 신입 여직원 성폭행 사건, 대구 가톨릭대 병원 간호사에 대한 병원 측 갑질 논란 등 익명 게시판을 통한 폭로와 고발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억울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사회 구성원이 자유롭게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는 것은 익명게시판의 큰 장점”이라며 “사회 정화나 순화 측면에서 익명게시판이 어느 정도 긍정적 기능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익명 게시판을 통한 회사 고발이 계속되다 보니 직원들의 익명게시판 활동을 감시하는 회사도 생겨나고 있다. 회사 관련 글이 올라오면 글 내용을 분석해 글을 올린 사람을 찾아내, 주의를 주거나 인사상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 블라인드 등 익명 게시판 등은 기술적으로 제3자가 글쓴이를 특정해 내는 게 불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규모가 작거나 회사가 직원들이 쓰는 이메일 시스템을 통제하고 있으면 추적이 아주 불가능하지 않다는 게 IT 전문가들 지적이다. 실제 회사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회사로부터 주의 조치를 받았다는 사례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모 스타트업에서 근무했던 박 모씨는 “직원 수가 적어서 그런 건지, 회사가 직원 메일을 뒤져봐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회사가 직원 뒷조사를 했다는데 실망해 다른 회사로 옮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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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게시판은 공감과 소통, 사회 부조리 고발 등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정보 범람, 사회 구성원 간 일탈 조장 등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직장인 최모(여ㆍ27) 씨는 이성 친구를 구하기 위해 최근 익명게시판에 ‘셀소’(셀프소개) 글을 올렸다가 성희롱 피해를 봤다. 셀소 글은 나이와 거주지, 직장 등 자신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는 일종의 연애용 자기소개서로, 연예 상대를 찾으려는 20, 30대 젊은 직장인들이 익명 게시판에 많이 올리는 글 중 하나다.

최씨는 셀소 글을 올린 후 남성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쪽지를 받았다. 그중 일부는 자신을 진지하게 소개하며 ‘만나보고 싶다’는 의사를 보인 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쪽지 내용은 성희롱과 성적 음담패설이었다. 성적 접촉 대가로 돈을 지불하겠다는 ‘조건 만남’ 제의도 있었다.

최 씨는 “익명 게시판에 자기소개 글을 올릴 여자는 쉽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거 같다”며 “이름과 신원이 공개되지 않으니 익명게시판 운영진 측에 신고하는 것 외에 별다른 대응 방법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성을 찾으려는 ‘셀소’글을 올리지 않더라도 성희롱 피해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맞벌이를 하는 주부 유 모씨(38)는 남편과 집안 문제로 싸움을 한 후 상담하는 내용의 글을 익명게시판에 올렸지만 ‘나를 한번 만나보라’라는 등의 쪽지를 잔뜩 받고 블라인드 게시판을 탈퇴해 버렸다.

유 씨는 “여러 가지 고민을 상담해주는 익명게시판에 그동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남편과 다툼 글을 올리고 난 후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며 “사람들의 이름을 감추는 익명성이 꼭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부정확한 정보의 확산도 익명게시판의 문제점으로 거론된다. 그동안 벤처나 바이오 주 등에 국한됐던 소위 ‘작전세력들’의 투자 권유 글이 최근에는 가상화폐로도 확산했다. 가상화폐의 경우 투기꾼이 아닌 일반 직장인들도 팀을 이뤄 ‘특정 가상화폐가 곧 폭등하니 사라’라는 글을 반복적으로 올리기도 한다.

지난해 가을 일부 제약ㆍ바이오주가 급등할 때 익명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보고 투자에 나선 직장인 박모씨도 손해를 봐야 했다. 원래 주식 투자를 하지 않는 박 씨지만 특정 회사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들이 하도 자주 글을 올리니 ‘나도 돈을 벌어보자’는 생각에 투자에 나섰다가 원금의 30%가량을 잃었다.

박 씨는 “익명게시판에 그 회사 관련 글이 하루에도 수십 건씩 올라올 때는 이미 주가가 최고점에 도달했을 때”라며 “주식을 팔기 전 분위기를 띄우려고 사람들이 그런 글들을 많이 올린다는 지인 말을 나중에 듣고 크게 후회했다”고 말했다.

익명 게시판의 여러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부작용이 속출하자 이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부정확한 정보나 욕설, 성희롱 등으로 얼룩진 익명게시판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점차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익명게시판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자정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곽 교수는 “자동차를 이용하면 원하는 곳에 빠르게 갈 수 있지만 교통사고를 당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며 “교통사고를 피하기 위해 신호를 지켜야 하듯 익명게시판의 장점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일정 규제나 사용자의 자정 노력이 반드시 동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민재용 기자 ins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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