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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무릎 꿇지 않는 나라

입력
2017.09.1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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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는 발뒤꿈치 쪽에 둔다. 양손을 무릎 위에 두고 고개를 숙인다. 무릎 꿇기 자세다. 무릎을 꿇는 자세가 무릎에 좋을까, 나쁠까? 한의학과 관련된 어떤 사이트를 보니 무릎을 꿇고 앉으면 관절염 발생이 줄고 간을 보호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스포츠 관련 사이트에서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무릎을 꿇으면 관절이 과도하게 꺾인 상태가 되어 무릎 내부의 압력이 높아져 무릎의 부담이 커지고, 무릎 관절을 지탱해주는 인대도 과도하게 긴장되고 혈액순환도 잘 안 되므로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으면 무릎 관절이 쉽게 약해진다는 것이다. 뭐가 맞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무릎을 꿇지 않는데 무릎을 꿇으면 무릎부터 종아리까지 아파오고 기분도 좋지 않기 때문이다.

무릎은 보통 굴욕적인 상황에서 꿇는다. 야시경을 달고 마을을 급습한 미군 병사에 둘러싸인 아랍 소년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들고 공포에 떨고 있는 모습이라든지, 주차 아르바이트 학생이 안내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갑질 하는 고객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모습이 생각난다. 아, 학부모가 교실에 찾아와 교사를 무릎 꿇리고 사과를 받는 모습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릎 꿇기는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다. 갑질 하는 사람들이 상대방에게 굴욕감(屈辱感)을 주면서 동시에 건강에 좋은 일을 하도록 할 것 같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지난 1일 저녁 9시쯤 부산 사상구의 한 공장 인근 골목길에서 열네 살 먹은 여중생이 무릎을 꿇은 채 한 살 더 많은 여중생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여중생은 약 90분 동안 공사 자재와 의자 유리병에 100여 차례 맞았다고 한다. 맞아봐서 안다. (웃기게도 나를 때린 사람은 깡패들이 아니었다. 나를 보호해야 마땅한 교사와 경찰들이었다.) 너무 많이 맞으면 나중에는 아프지도 무섭지도 않다. 그저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때리는 소녀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더 이상 때려봐야 소용도 없고 지치기만 했을 것이다. 빨리 끝내고 싶었을 것이다. 소녀들은 무릎 꿇기를 요구했을 것이고 소녀도 무릎을 기꺼이 꿇었을 것이다. 굴욕이다.

지난 5일 저녁 10시쯤 서울 강서구의 한 초등학교 강당에서 엄마들이 무릎을 꿇은 채 사진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특수학교 건립을 위한 토론회장이었다. 딱 두 달 전인 7월 5일 무산된 주민토론회가 다시 열렸지만 토론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고성이 오갔을 뿐이다.

“여러분도 부모고 우리도 부모입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기 지을 수 없다고 한다면, 그럼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들이 욕하시면 욕 듣겠습니다. 모욕 주셔도 괜찮습니다. 때리셔도 맞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학교는, 학교는 절대로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장애 아이들도 학교는 다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토론이 진전되지 않자 한 장애인 자녀를 둔 엄마가 강당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그 모습을 본 장애인 부모 수십 명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 나왔다. 옆에, 뒤에, 줄지어 무릎을 꿇었다. 장애자녀 손을 잡고 나온 여성은 아들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자신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스스로 굴욕적인 자세를 취한 것이다.

반대하는 주민들도 무릎을 꿇었다. 이들은 마이크를 잡고 “교육감님, 가양2동 주민들도 살게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우리보고 죽으라는 겁니까?”라고 외쳤다. 그들도 굴욕적이었을 것이다. 평생 번 돈으로 겨우 하나 마련한 아파트 값이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장애인학교가 들어오면 집값이 떨어진다는 근거는 없다. 내가 살고 있는 일산에는 한국경진학교라는 정서 행동장애 학생을 위한 특수학교가 있다. 유치부,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전공과를 두고 있다. 바로 앞에 있는 일반 고등학교를 다니는 딸은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집값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장애인 시설이 집값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막연한 공포일 뿐이다.

마포구 상암동에 세워진 푸르메넥센어린이재활병원도 마찬가지다. 2010년 주민설명회 자리 역시 장애 어린이의 부모들이 주민 앞에서 눈물로 호소했지만 그들에게 돌아간 것은 욕설과 고성이었으며 멱살잡이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병원 안의 도서관과 수영장, 치과를 주민들이 공유하고 있다. 1층 로비는 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강서구민들이 마포구의 어린이재활병원을 방문해 보면 좋겠다.

장애인들도 학교에 당당히 갈 수 있어야 하고, 장애인학교가 들어오면 지역 주민들의 삶이 더 좋아져야 한다. 장애인학교가 주민들을 위한 체육시설과 문화시설이 되어야 하고 마을의 중심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교육청과 국회의원이 책임지고 해결할 일이다.

부산 사상구에서 여중생이 꿇은 무릎과 서울 강서구의 장애 학생 부모들이 꿇은 무릎은 같은 무릎이고 의미도 같다. 굴욕이다. 시민들이 무릎 꿇지 않는 나라, 그게 나라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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