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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
어린이문학평론가ㆍ동시인

등록 : 2017.11.30 10:57
수정 : 2017.11.30 19:33

[김유진의 어린이처럼] 인디언 아이처럼

등록 : 2017.11.30 10:57
수정 : 2017.11.30 19:33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일주일 연기됐다는 뉴스 속에서 눈길을 끈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이제 내일이면 필요 없을 거라고 내다 버린 문제집 더미를 헤치며 도로 책을 찾는 수험생들 모습이었다.

어쩌면 불쏘시개로 써 버려도 전혀 아깝지 않을, 분서갱유 하듯 활활 태워버리고 싶었을 책을 다시 펼쳐봐야 할 그들의 일주일이 참으로 짠했다.

시험 이후 설문조사에서 수험생 대부분은 엄청난 중압감을 다스려야 했던 유예의 시간이 당연히 시험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수능 연기를 잘한 결정으로 여기고 있었다. 나에게 그랬듯 너에게도 쉽지 않았을 이 나라 입시 교육을 함께 겪은 또래. 그들 모두 공정한 기회를 누려야 한다는 연대감을 느꼈기 때문이라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다음과 관계없는 것을 고르시오.//정답이라도/관계없는 하나를 골라내고 나면/외로워졌다//쉬는 시간인데/나 혼자 문제를 푼다/아무하고도/관계가 없는 사람처럼(‘문제 7번’)”

문제를 받아 들고 정답을 생각하기보단 대답들 가운데 정답을 가리는 훈련이었다. 다섯 개 대답의 관계 속에서 문제 의도를 거슬러 발견하면 정답을 몰라도 정답을 맞힐 수 있는 요상한 시험의 연속이었다. 그 시험으로 학벌, 즉 출신학교에 따른 사회적 지위와 등급이 결정된다. 일등석부터 팔등석까지 자리 매겨 놓고 폭주하는 기차에서는 누구나 외로울 수밖에 없다.

외로운 문제풀이가 ‘인디언 아이처럼’의 “국어책”일까. 아이는 교과서를 지우고 학교 공부를 넘어 드넓은 초원을 마냥 뛰놀고 싶어 한다. “빈 국어책”을 종횡무진 하는 아이의 발자국은 백지에 자기만의 무늬와 색깔을 그려가겠지. “국어가 없는 사람처럼” 경계를 가로지르고 세계를 넘나들며.

아이는 “국어책에 있는 글자”를 읽는 대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문자(글) 세계에서 구술(말) 세계로 이행하려 한다. 문자문화에 익숙한 지금 구술이 부수적으로 여겨지지만 기실 언어는 소리에 의존한다. 책을 ‘읽는다’는 건 실제 목소리로 발음하든 머릿속에 소리를 불러일으키든 텍스트를 음성으로 옮기는 행위다. 그러니 글자를 불태우고 사냥 이야기를 듣는 인디언 아이가 되고픈 바람은 언어와 세계의 시원 가까이 다가가려는 열망이다.

함박눈 내린 벌판을 가로지르며 뛰놀고 싶은 아이는 다섯 가지 대답에 갇힐 수 없다. 문제의 정답을 맞히는 일은 시시하다. 국어책의 글자쯤은 뚝딱뚝딱 눈썰매로 만들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소리를 따라 문제를 찾아 나서는 길이 인디언 아이에게는 딱 어울린다.

김유진 어린이문학평론가ㆍ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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