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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평양냉면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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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평양냉면이 뭐길래

입력
2018.05.01 10:4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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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잖아도 그 입맛이 막 당기던 참이었다. 연 이틀 친구들을 불러내 줄을 서 기다리며 먹고 말았다. 판문점에 ‘어렵사리’ 배달된 옥류관 평양냉면을 보며 맹렬하게 타오르는 목젖의 본능을 어쩔 수가 없었다.

입천장에 들러붙는 메밀의 거친 향기, 입 안 가득 머금은 슴슴한 육수와 함께 목구멍을 탁 치며 넘어가는 면발의 오묘한 감촉, 요 며칠 그 맛에 행복했다. 신문사 특파원 근무를 마치고 3년 만에 귀국해 짐을 풀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간 곳도 단골 평양냉면 집이었으니 나도 냉면에 대해 한마디 논할 자격은 있다고 본다.

평양냉면(평냉)은 한국에서 가장 ‘논쟁적’ 음식이다. 열광 아니면 무시, 둘 중 하나로 명확하게 갈린다. 마니아들에게는 남과 다른 특별한 미각이라는 자부심을 드러내는 음식이다. 먹으면서 한마디씩 던지는 말은 거의 미식의 경지다. 오죽하면 ‘면스플레인’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가위로 면을 싹둑 자르면 사생결단이 날 판이다. 식초나 겨자를 치면 냉면에 대한 모욕이다, 면발은 붇기 전에 먹어야 하니 주방 바로 옆에 앉아라, 이가 아니라 목젖으로 끊어 먹어라, 의정부와 장충동 계보는 이렇게 다르다, 압권은 애인이 평냉을 못 먹어서 헤어졌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미 맛의 문제를 떠났다.

마니아들이 평양냉면에 바치는 헌사는 거의 종교적이다. ‘슴슴하다’와 ‘밍밍하다’는 평냉에 만 허용되는 형용사다. 그 어감이 평냉의 풍미와 식감과 참 잘 어울린다. 어느 고수는 ‘무미(無味)’야말로 평양냉면의 진정한 맛이라고 일갈했다. 시인 백석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심심한 것은 무엇인가, 그지없이 고담(枯淡, 꾸밈없이 담담한)하고 소박한 것’이라고 했다. 평냉은 온몸의 감각을 살려 먹어야 한다. 아마 평냉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영혼의 음식’이 아닐까. 나도 혼자 냉면집에 들렀다가 별 것도 아닌 이놈이 대체 뭐길래, 영혼의 허기가 싸악 가시는 기묘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번에 평양냉면이 제대로 한몫을 했다. 남북정상회담 신 스틸러(scene stealer, 주연 이상으로 주목받는 조연)로 등극했다. 핵이라는 묵직한 밥상에 감칠맛 나는 양념을 쳤다. 군사분계선을 건너 배달된 최초의 음식, 역시 한국민은 배달민족이라는 네티즌의 기발한 비유에 한참 웃었다. 이제 평화의 상징은 비둘기가 아니라 냉면으로 바꿔야 한다든지, 북한이 판문점에 가져온 옥류관 제면기를 영구 전시하자든지, 버스 타고 평양 가서 냉면만 먹고 오는 관광상품을 개발하자든지, 이제는 개마고원 트레킹을 하며 함흥냉면을 먹어야 할 차례라든지…

만찬 식탁에 평양냉면이 아니고 설렁탕이나 비빔밥이나 파스타가 올랐다면 이런 말들이 나왔을까. ‘쌔려먹는(김정은 위원장)’ 디저트 망고무스의 아이디어는 이벤트적 성격이지만, 평냉은 다르다. 우리만이 느끼고 이해하는 민족적 정서와 상징이 있기에 그 어떤 음식도 당할 수가 없다.

냉면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아프고 질긴 음식이다. 디아스포라(이산) 음식이다. 땅은 갈라졌지만 음식은 남과 북에서 각기 명맥을 이어 왔다. 그 DNA는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로 전이되는 특이한 구조다.

요리는 가장 오래 된 외교수단이라는 말도 있지만, 평양냉면은 외국 언론들이 말하는 ‘누들 디플로머시(국수 외교)’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우리는 다 함께 목격했다. 음식이, 입맛이 통하고, 통역이 필요 없는 세계 유일의 정상회담을 지켜봤다. 사람들은 평양냉면을 먹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건 어떤 메시지보다 강력했다. 어떤 설득보다도 힘이 있었다. 북에서 온 평양냉면은 ‘신의 한 수’였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 파종된 꽃씨였다.

한기봉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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