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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적폐수사가 놓치고 있는 검찰개혁

입력
2017.10.26 20: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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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자신을 검찰개혁론자라고 소개한 검찰 내부 인사를 만났다. 그는 누군가의 영장 사본들을 잔뜩 들고 와서 보여줬다. 체포영장 통신영장 계좌추적영장 압수수색영장 구속영장을 펼쳐 놓더니 나를 빤히 노려봤다. 그러면서 대뜸 “영장을 보기만 해도 무섭지 않냐”고 물었다. “당신이 더 무섭다”며 물러서자, 그는 “무서워할 것 하나도 없다. 영장에 적힌 내용을 다 믿느냐”며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요지는 검찰은 강제수사를 통해 가능한 한 많은 자료와 피의자 신병을 확보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당장 필요 없는 자료도 영장에 포함시키려고 한다. ‘일단 확보하고 보자’는 심리는 과잉청구로 이어진다. 3년치 계좌가 필요해도 10년치 영장을 청구하고, 5곳으로도 충분하지만 ‘혹시 모르니’ 10군데 이상 압수수색 하고 싶어한다. 체포영장과 압수수색 영장을 작성할 때는 대체로 제보자나 참고인 진술이 적시되는데, 과장과 스토리가 일부 섞이기도 한다. 그럴듯하게 보여야지 판사가 영장을 발부해 주기 때문이다. 법원에 제출할 구속영장 뒷부분에 ‘구속을 필요로 하는 사유’를 장황하게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가 내린 결론은 “검찰이 꼭 필요한 부분만 청구하길 바라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과잉 영장청구가 많기 때문에 법원에서 걸러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대로 법원은 영장을 기계적으로 발부해 주는 곳이 아니다. 엄격히 심사하고 걸러서 통제해야 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통제 받지 않는 권한을 행사하는 대한민국 검찰에게는 특히 법원의 통제라도 필요하다. 마음대로 수사를 개시하고 중단하고, 구속영장 청구와 기소를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곳에서는 기회만 되면 힘 자랑을 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다. 검찰이 절제된 권한을 행사하겠다며 10년 넘게 자체 개혁을 외쳤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모두가 지켜보지 않았는가.

그렇게 적폐세력으로 몰려서 고개도 못 들던 검찰이 최근 적폐수사를 주도하면서 원기회복을 했다. 청와대의 유례 없는 지원과 여론의 지지 속에 ‘우리가 가는 길 누가 막겠냐’는 기세다. 적폐수사를 진두지휘 하는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대표적인 검찰조직 우선주의자요, 구속수사 신봉주의자이다 보니 더욱 거칠 것이 없다. 결국 청와대의 끝없는 수사의뢰로 세상의 관심을 빨아들이면서 검찰은 예전의 위상을 회복했고, 검사들도 한창 때처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하지만 잘 나갈 때 절제하라는 말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윤 지검장이 지난달 법원의 영장 기각을 두고 “법과 원칙 이외에 다른 요소로 결정하는 것 같다”고 언급한 부분에선 내 귀를 의심했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관련 수사에서 통신영장이 기각된 사실을 밝히면서 “이런 수사는 하지 말라는 모양”이라며 법원을 힐난하는 모습에선 섬뜩함마저 느꼈다. 영장 발부는 당연한 것이고 기각은 법원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는 인식인데, 이는 검찰이 법원을 수사도구 정도로 여긴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정부와 여당도 이런 검찰의 모습을 용인해주고 있다. 오히려 과거와는 정반대 입장을 보이면서 정치권에서 검찰개혁이란 구호는 온데간데 없어졌다. 청와대와 여당인사 누구도 불구속수사를 원칙으로 삼을 것이며, 저인망식 수사를 지양하라고 외치지 않는다. 거꾸로 영장을 왜 기각했느냐며 법원을 호통치고, 끊임없이 수사확대를 주문한다.

적폐수사의 필요성은 인정되지만, 역설적으로 검찰개혁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청와대가 적폐수사를 마칠 때까지만 검찰을 활용하고, 이후에는 검찰의 힘을 확 빼겠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순진한 생각이다. 이미 원기를 회복해 부풀어 오른 검찰의 기세를 다시 누르려면 적지 않은 반발이 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 검찰이라고 특별하지 않다. 힘 자랑하려는 속성은 박근혜ㆍ이명박 정부 검찰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정치권에는 여야가 있지만, 검찰은 그냥 검찰일 뿐이다.

강철원 사회부 기자 str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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