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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커다란 권력은 백성에게 빌린 것인데…

입력
2015.07.24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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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것을 좋아하는 임금님 안노 미쓰마사 지음, 송해정 옮김 시공주니어 발행ㆍ30쪽ㆍ7,000원
커다란 것을 좋아하는 임금님 안노 미쓰마사 지음, 송해정 옮김 시공주니어 발행ㆍ30쪽ㆍ7,000원

고려 문신 이곡이 말했다. “사람이 지닌 것 가운데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 뭐가 있을까.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권력을 빌려 존귀하고 부유하게 되는 것이요,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 총애를 받고 귀하게 되는 것이다. 자식은 어버이에게서, 지어미는 지아비에게서, 비복(婢僕)은 주인에게서 각각 빌리는 것이 또한 심하고도 많은데, 다들 본디 제 것인 양 여기고 끝내 돌이켜 생각해 보질 않으니 어찌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는가.”(‘차마설?借馬說’, ‘가정집?稼亭集 권7’)

커다란 것만 좋아하는 임금님이 커다란 꽃을 피울 거라며 어마어마한 화분을 만들었다. 하지만 자연의 순리는 작고 예쁜 꽃을 피웠다. 시공주니어 제공
커다란 것만 좋아하는 임금님이 커다란 꽃을 피울 거라며 어마어마한 화분을 만들었다. 하지만 자연의 순리는 작고 예쁜 꽃을 피웠다. 시공주니어 제공

그림책 속에 꼭 그렇게 어리석은 자가 있다. ‘커다란 것을 좋아하는 임금님’. 이 친구는 실은 커다란 것‘만’ 좋아한다. 커다란 모자를 쓰고 커다란 자전거를 타고, 커다란 칫솔로 이를 닦고, 커다란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커다란 접시에 커다란 포크와 나이프로 음식을 먹는다. 임금의 편향증은 극에 이르러 급기야는 백성들을 동원해 커다란 연못을 파고, 커다란 낚시를 드리워 아주 커다란 물고기를 잡고 싶어 하니, 미련한 신하들이 커다란 고래를 잡아와 커다란 낚싯바늘에 걸어 준다. 연못을 파 낸 흙으로는 커다란 화분을 만들고 빨간 튤립 알뿌리 하나를 심어 놓는다. 그러고는 날마다 화분을 바라보는 것이 커다란 즐거움이다. ‘화분이 크니까 틀림없이 아주 아주 커다란 튤립이 필 거야.’

이런 위정자가 어찌 이야기 속에만 있을까? 제 권세를 믿고 제가 좋아하는 짓만 하려 드는 자들. 그들은 제 눈에 드는 사람만 가려 쓰려 하고, 제 맘에 들지 않는 자는 내치려 든다. 만나고 싶은 자만 만나려 하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한다. 저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함부로 혈세를 동원하고 마구잡이로 국토를 파헤친다…. 그런데 그들의 권세가 본디 자기 것인가? 700년 전 왕조시대에 국록을 먹던 이의 인식도 위와 같은데.

이곡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혹 잠깐 사이에 그동안 빌렸던 것을 돌려주는 일이 생기게 되면, 만방(萬邦)의 임금도 독부(獨夫)가 되고 백승(百乘)의 대부(大夫)도 고신(孤臣)이 되는 법이니, 미천한 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맹자가 말하기를 ‘오래도록 빌려 쓰고도 돌려주지 않았으니, 그들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인용한 맹자의 말에서 역성혁명론의 싹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림책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봄이 되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화분에서는 아주 작고 귀여운 튤립 한 송이가 피어났습니다.” 그 어떤 권력도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림책을 지은 안노 미쓰마사는 임금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는 듯하다. 이 책을 보는 독자들의 마음도 그와 같을 것이다. 커다란 화분 속에 꼿꼿이 서 있는 빨간 튤립 한 송이가 당황한 임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김장성ㆍ출판인(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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