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20분 만에 끝이 났다. 트럭이 멈춰 섰고 큰 문과 그 위에서 환히 빛나는 글씨가 보였다(그 기억이 아직도 꿈 속에서 나를 괴롭힌다). ‘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케 하리라).”
메르스 확진자가 100명을 넘겼다. 사망자도 시시각각 늘어난다. 뉴스에 댓글을 다는 일 이외에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무력하다. 멍하게 서가를 들여다보다 프리모 레비의 소설 ‘이것이 인간인가’를 펼쳐 들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레비가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기록한 책, 극한의 폭력에 노출된 인간이 어떻게 존엄성을 잃고 타락할 수 있는지를 그린 책이다.
아우슈비츠는 인간에게 이성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은 곳, 인간이라면 이럴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실제로 행해진 곳이다. 르네상스 이래 축적되어온 유럽의 계몽주의적 인간관이 처절하게 분쇄되었던 곳이다.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을 기록하면서 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자체의 위기를 증언한다.
제2차 대전 뒤 현대 문명의 파탄에 대해 성찰한 무게 있는 저작이 하나 더 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쓴 ‘계몽의 변증법’이다. 공동체에서 반년 이상 계속해 왔던 ‘계몽의 변증법’ 강독을 일시 중단하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메르스의 유행과 때를 맞췄다. 처음 10명 안팎이었던 강독 참여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 급기야 강독을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 책을 강독하게 된 계기는 분명했다.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의 전체주의, 경제절대주의가 지구 구석구석 작동되고 있는 시대, 도구적 합리성에 내몰리고 있는 인간을 돌아보기 위해서다. 그런데 하필 이 시기에 강독을 중단하다니.
사실 대안 인문학 공동체에서의 공부는 치열함과는 거리가 있다. 대안을 깃발로 내세우고 있지만 늘 대안을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어찌 보면 대안 인문학 공동체에서 푸코나 들뢰즈가 인기를 끄는 것도 이들의 사상에서 사회 변화를 위한 대안을 모색하기보다 이들의 사상을 공부하며 얻는 즐거움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공부가 힘이 없다는 건 아니다. 푸코나 들뢰즈는 물론이고 칸트와 헤겔, 스피노자, 하이데거 같은 사상가의 난해한 저작들을 해를 넘겨가며 뜯어 읽을 수 있는 힘은 공부의 즐거움 덕이다. 그렇잖아도 먹고 살기에 바쁜 이들이 매주 ‘맹자집주’나 ‘주역’ 원전을 공부할 수 있는 것도 시험이나 스펙을 위해 강제로 하는 공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월호가 침몰하고 메르스가 창궐해도 인문학 공동체는 책만 읽으면 되는가. 공동체의 한 문학 동아리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주제 사마라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고 메르스가 창궐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한 도시의 주민 거의 모두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집단 실명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는 소설, ‘페스트’는 사람들이 페스트균에 의해 무더기로 죽어나가는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집단 괴질 앞에서 시민은 물론 행정기관까지 속수무책인 점에서, 위기 앞에 벌거벗은 인간에 대한 성찰을 하는 점에서 두 소설은 같다.
메르스를 막는 효율적인 대책은 방역이다. 과학에 근거해 신속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문학이 끼어 들 여지는 없다. 본래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면서 날개 짓을 시작하는 법 아닌가. 그럼에도 작금의 상황에서 침묵만이 금일 수는 없다. 이런 시기일수록 현대 문명과 인간을 돌아보는 대화와 토론을 해야 한다. 대화와 토론은 행동만 필요한, 다급한 상황 속에서 더욱 중요하다. 말하기야말로 성찰 없는 실천, 인간보다 경제를 앞세우는 행동이 가져올 상황의 악화를 막을 수 있다. 먹고 살기에 급급한 와중에도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말하기가 필요한 때 말을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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